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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누리 /문화유산 나들이

문의문화재단지

by 지암(듬북이) 2017. 1. 10.


문의문화재단지

 

문의문화재단지는 1980년 대청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된 문의면 일대의 수몰 유적과 청주 일원의 유,무형 문화재를 수집, 전시함으로써 우리 전통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조성된 역사교육장이다.

단지 안에는 선사유적과 문산관(충북유형문화재 제49호)를 비롯한 전통 가옥과 서덕길 효자각, 김선복 충신관을 원형대로 옮겨 세웠고 문의지역의 옛 비석들을 모은 비석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이밖에 양반가옥, 주막집, 대장간, 성곽을 재현해 전통문화의 향기와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또한 2004년에 준공된 대청호미술관에서는 대청호반 위에 있어 좋은 경치와 함께 좋은 그림이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33,000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 위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의 조망도 아주 좋은 편이다.

-출처: 청주시 문화관광과



▲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 다음 지도에서의 문화재단지



▲ 전체 모습



▲ 주차장 입구 쪽에 설치된 문의수몰유래비



▲ 양성문






▲ 양성문 담장 위에 설치된 솟대




▲ 고인돌과 소나무



▲  양성문 지나서 돌탑과 윗 쪽의 십이지신상.


▲  서덕길 효자각



▲  관정리 고가



청주 관정리 고가(淸州 官井里 古家)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의 문화재 단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03년 4월 11일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이 민가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낭성면 관정리의 신방호(申邦浩)씨가 살던 가옥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이전 복원한 집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이다. 가옥의 구조는 ‘一’자집 형태의 안채와 대문이 있는 광채가 있다.

 

상량문이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파악할 수 없으나, 조선후기 건물로 추정된다. 현재의 건축은 1992년 문의 문화재단지를 조성하면서 1994년 관정리에서 이건(移建)하였으며, 당시 소유자인 신병호씨의 증언대로 5대조가 대대로 살아온 집이라고 하면 최소 200여 년 전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건축의 양식은 당시 부농이 주택으로 초가집의 가구구조보다는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세부 치목 또한 매우 정교하고 평면구성도 5칸 집으로 전형적인 충북의 민가건축의 몸체 형식이고 대청에 신주를 모셔둘 신주 함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당시의 초가집에 비해 매우 건축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대문간채와 광채는 안채와 담장 사이에 대문간채가 따로 있었으나 이전하면서 대문간채를 별도로 건축하지 않고 광채와 같이 ‘ㄱ’자집으로 건축하였다. 이는 문화재단지의 지형적인 조건에 맞추어 건축되면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부농의 주택으로 초가집의 가구구조보다는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세부 치목 또한 매우 정교하고 전형적인 충북의 민가건축으로 당시의 초가집에 비해 매우 건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  멍석과 다듬잇돌




▲  채반



▲  다듬잇돌과 다듬이 방망이



▲  곳간/헛간





▲ 노현리 고가


청주 노현리 고가(淸州 蘆顯里 古家)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의 문화재 단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03년 4월 1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문의면 노현리 이양훈(李讓勳)씨가 살던 가옥을 이축한 것으로 당초에는 강릉김씨(江陵金氏) 김승지(金承旨)의 종가(宗家) 댁이었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ㄱ’자 형태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광채와 사주문(四柱門), 측간(厠間)은 목조초가이다. 광채는 ‘一’자 집이다.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0년 6월 전국 취락 및 전통가옥(민가)조사 기록대장에 의하면 약200년 전에 지었으며, 엄씨, 김씨가 살다가 연안 이씨가 입주후 이성훈씨가 살았다고 한다. 또한 조사 당시에 안채, 사랑채, 곳간, 축사 등 4채의 전통기와집이었다고 조사되어 왔다.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건하여 재건축되었으며 현재는 ‘ㄱ’자형 안채와 ‘1’자형의 대문간 및 곳간, 축사로 건축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건축되지 않았는데 이건하는 시기에 사랑채가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의 평면형식은 충청지역 민가의 특징을 갖추게 구성되어 있고 건축의 가구기법은 일반민가보다 세부분까지 정교하게 가공되었다. 또한 이전과정에서 안채의 지붕의 합각부분이 조금 높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의 평면형식은 충청지역 민가의 특징을 갖추게 구성되어 있고 건축의 가구기법은 일반민가보다 세부분까지 정교하게 가공되어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 가마






▲ 대청호 미술관




▲ 전망대에서 바라 본 단지 모습


▲ 문산관


문산관은 조선시대 문의면의 객사이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있던 관사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달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구조는 지붕이 좀더 높은 정당(政堂)이 중앙에 있고 그 좌우로 익실(翼室)을 두고 좌·우익실은 온돌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건물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단지 옛 문의읍지(文義邑誌)에 현종 7년(1666)에 현령 이명하가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붕의 암막새 기와에 『옹정6년 무신4월(雍正六年 戊申四月)』이라 새겨진 글씨로 보아 조선 영조4년(1728)에 한차례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79年에는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문산관이 수몰지역에 있게 되어 문의 향교옆에 옮겨놓았다가 1997년 문의문화재단지 조성에 따라 문의문화재단지내로 이전하였다.

문산관은 목조기와집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의 2익공집인데 정당은 정면3칸, 측면3칸이고 우익실은 정면4칸, 측면3칸이며 좌익실은 정면3칸, 측면3칸이다. 그리고 바닥은 정당은 온돌이고 좌우익실은 한국식 우물마루로 되어있다.






▲ 문산관 좌측에 있는 돌탑과 장승


▲ 놀이마당



▲ 부강리 고가


청주 부강리 고가(淸州 芙江里 古家)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의 문화재 단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03년 4월 1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21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의 안채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부용면 부강리 김종철(金鍾喆)씨가 살던 고가를 이전 복원한 것으로 ‘ㄱ’자집 형태의 목조기와집이다. 광채는 지붕을 얇은 판석으로 덮은 돌기와집(석와가(石瓦家))형태로 중부지방의 산골부락에 많이 있었던 형태이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ㄱ’자형태의 목조와가이고 광채는 ‘一’자 돌기와집이다. 1995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2년 전국 취락 및 전통가옥(민가)조사 기록대장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 거주하였던 송동촌씨의 3대 선친이 건축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건립년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는 문의문화재단지 내에 ‘ㄱ’자형 몸채와 대문채가 이건되었다. 그러나 1982년 조사기록대장의 사진에 의하면 대문간채가 없었으며 건물로 진입하는 입구의 방향도 사랑방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현 상태와는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특히 집을 진입하는 방향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문화재단지의 조성과정에서 원형대로 배치하기가 곤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랑방 쪽은 우진각 지붕이고 안방 쪽 날개채는 맞배집 형태이다.

 

건축의 형식은 일반 서민민가 중에서 전통 기와집의 형식이며 구조양식이 민도리 3량구조로 아담하고 소박한 민가 주택으로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 양반가








▲  유물전시관




▲ 문산리 돌다리


청주 문산리 돌다리(淸州 文山里 石橋)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의 문화재 단지에 있는 돌다리이다. 2003년 4월 1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청원 문산리석교는 원래 대청댐 수몰전에는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던 것인데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 미천리에 문산관과 함께 이전하였다가 2002년 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하였다.

 

이 석교에 대한 문헌은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처음으로 나온다. 축조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교각 상판은 2.5m×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 10개이며, 석주는 1.3m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판의 장대석(長臺石)은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결하여 놓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하여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 동서로 교각이 받치고 있으며, 석재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또한 석재(石材)는 거친 다듬하였으며, 석주(石柱)를 갖춘 시렁교이다.

 

이 석교는 역사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내에서도 옥천청석교, 진천농교, 청주 남석교(南石橋)와 함께 몇 기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석교이다.

 

석교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하여 교각의 역할을 하고, 멍에석을 가구하고 상부에 넓은 석판재로 덮어 마감하였다. 특히 청주 남석교보다 훨씬 고식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형태는 매우 안정되어 보이고 구조적 균형감이 잡혀 있어 문화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 유물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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