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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누리 /문화유산 나들이

삼세충효문(三世忠孝門)

by 지암(듬북이) 2017. 1. 18.




삼세충효문(三世忠孝門)

 

충북 청원군 북일면 비중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사우. 충청북도 기념물 제40호. 목조 기와지붕으로 나사종의 충신문과 아들 나운걸과 손자 나빈, 나린 형제의 삼효문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40호. 목조 기와지붕이다. 안정라씨(安定羅氏) 종중 소유이다.

 

나사종(羅嗣宗, 1440∼1491)의 충신문(忠臣門)과 그의 아들 나운걸(羅云傑, 1456∼1495)과 손자 나빈(羅濱, 1473∼1495)·나린(羅潾, 1475∼1495) 형제의 삼효문(三孝門)을 말한다.

 

나사종은 자(字)는 광원(光遠), 호는 퇴수헌(退修軒)인데 효성이 지극하고 학행과 무술이 뛰어났으며 특히 궁마(弓馬)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충청도 관찰사 성준(成俊)의 천거로 발탁되었다.

 

그 후 1486(성종 17)에 경흥부사(慶興府使)가 되었고, 1491년(성종 22)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이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숙종은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청주목사 김한에게 명하여 충신문을 건립하였다.

 

그의 아들 나운걸은 호가 효강(孝剛)인데,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허종(許宗)의 여진정벌에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올적합을 죽이지 못하자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탈상(脫喪)하는 날 자결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나빈과 나린 형제도 효성이 깊어 여진정벌에 자원하였으나 뜻을 못이루자 역시 아버지 삼년상이 끝나는 날 피를 토하고 자진(自盡)하니, 삼 세가 기일을 같이하는 충효를 남기었다.

 

1698년(숙종 24) 삼효문(三孝門)이 나라로부터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고을에 세운 정문)되었다.

 

건물구조는 충신문은 목조기와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二翼工) 팔작(八作)집이며 그 안에 현판(懸板)이 걸려 있고, 삼효문은 목조기와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일익공(一翼工) 맛배집으로 그 안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1957년 중수되었다.

 

담장은 홍살문이 있고 마당에는 1946년에 세운 신태구(申泰求) 짓고 변영인(卞榮寅)이 쓴 〈정안나씨삼충효비 定安羅氏三世忠孝碑〉가 서 있다. 그 자료적 가치가 인정되어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가, 현재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0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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