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나무라기 전에 금수저 너나 잘하세요
-김형민(SBS CNBC 프로듀서)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바다를 지키려 애쓴 건 <조선왕조실록>에 가계에 대한 기록 한 줄 등장하지 않는 강진흔이었다. 역사를 보면 늘 문제를 일으키는 쪽은 흙수저의 피해의식이 아니라 금수저의 무책임이었다.
정묘호란 후 ‘형제의 의’를 맺었던 만주족들이 1636년 청(淸) 제국을 만들고 칸을 ‘황제’로 칭하면서 조선은 결정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리게 돼. 조선 국왕 이하 지배층은 죽어도 청나라 황제를 황제라 부를 수 없고 스스로를 그 신하라고 칭할 수도 없었단다. 왜? 그들에게 황제란 명나라 황제뿐이었으니까. 인조 임금은 마침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유시문을 내려.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과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자.”(<역사평설 병자호란> 한명기 지음, 푸른역사 펴냄)
마침내 전쟁이 터지고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기병대는 ‘전격전’을 펼쳤어. 산성에서 활 잡고 있던 조선군을 닭 쫓던 개로 만들어버리고 무서운 속도로 한양으로 내달린 거야. 조선 조정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넌 7일 후에야 전쟁 발발 보고를 받는데, 그 순간 청나라 군대는 한양 근처로 육박하고 있었어. 강화도를 향해 어가(御駕)가 출발했지만 이미 오늘날 불광동 근처까지 출몰한 청나라 군대가 발길을 막았어. 그래서 들어간 곳이 남한산성이야.
강화도에는 임금의 두 아들과 세자빈과 원손 등이 이미 피란을 가 있었지. 강화도 방어 책임자는 김경징.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었어. 요즘 말로 대단한 ‘금수저’였지. 인조반정에 가담해서 과거 급제하기도 전에 2등 공신에 군(君) 칭호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인생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사람은 조선 왕조 역사에 남을 망나니 금수저였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삼전도비 옆 부조물.
<병자록>에 보면 김경징은 어머니와 아내를 덮개 있는 가마에 태우고 계집종은 전모(剪帽)를 씌웠으며, 집에서 싣고 나온 짐 보따리가 50여 개나 되어 그걸 운반하려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동원했어. 심지어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를 먼저 실어 나르느라 세자빈이 배를 구하지 못해 바닷가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고 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세자빈이 김경징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지. “경징아 김경징아. 네가 어찌 이런 짓을 하느냐.” 그제야 김경징은 미적미적 세자빈을 강화도에 데려다 놓았다고 해.
그 후로도 김경징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잔치나 벌이고 술이나 퍼먹는 외에 그는 어떠한 방어 대책도 수립하지 않아. 글깨나 배운 그는 <고려사>에 나온 몽골과의 전쟁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 무서운 몽골병도 이 바다를 뛰어넘지 못했거늘 하물며 여진 오랑캐 따위가 어찌 건널까 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청나라는 항복한 명나라 수군 장수들을 활용하여 역시 과감한 ‘강화 상륙작전’을 전개해. 이때 청나라 함대가 몰려나온 곳이 강화도 갑곶이었고 이 일대를 수비하던 건 충청 수사 강진흔이었어. 기습을 맞은 강진흔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이 터져라 독전하며 맞싸워 청나라 배 3척을 침몰시키며 분전했어. 이때 주사대장, 즉 강화 지역 해군사령관 장신의 함대가 도착했고 조선 함대에서 환호성이 일었지만 이내 수그러들고 말아. 청나라 수군이 덤벼들자 장신이 뒤로 돌아 도망쳐버린 거야.
이때 강진흔의 외침은 통렬하게 절박하고 미치도록 슬펐단다. “장신! 네가 나라의 은혜를 두터이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 너를 베어 죽이겠다.” 이 외침을 들은 다른 장수들이 구원하러 달려가려는 것도 장신은 막았어. 이 꼴을 보다 못한 군관 하나는 피를 토하듯 장신을 꾸짖으면서 바다에 몸을 던진단다. 이렇게 되자 강진흔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나지. 수군이 무너진 뒤로는 이렇다 할 방책이 없었어. 김경징은 쪽배를 타고 충청도로 도망가버리고 강화도의 세자빈과 왕자들 이하 사농공상 백성은 고스란히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아.
전쟁이 마무리된 뒤 패전 책임을 묻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 그런데 임금은 강화도 방어 책임자 김경징과 수군 지휘관 장신을 죽여야 한다고 입에서 불을 토하는 신하들 앞에서 기묘한 말을 해.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법대로 처벌하는 것은 과할 듯싶다.” 이게 무슨 뜻이겠니? 장신도 장신이지만, 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린 반정 1등 공신의 아들이자 2등 공신 김경징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이미 한 배를 타고 끼리끼리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백년같이 누리던 그 시대의 금수저들이었거든.
하지만 김경징의 죄는 너무나 컸고 눈에 불을 켜고 대드는 신하들의 등쌀에 임금은 어쩔 수 없이 김경징에게는 사약을, 장신에게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그런데 붙들려온 김경징이 사약이 내렸다는 소식에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옆에서 “어차피 죽을 것 체통을 지키시오” 하는 또 하나의 사형수가 있었어. 그건 바로 강화도 앞바다에서 피눈물 쏟으며 싸운 충청 수사 강진흔이었어. 강화도 앞바다에서 가장 열심히 싸운 그에게는 외려 참수형이 떨어졌단다.
충청 수영의 병사들과 군관들이 대궐 앞에 가서 엎드려 울부짖었어. “그때 강화 앞바다에서 싸운 사람은 우리 장군밖에 없습니다.” 눈앞에서 도망간 사령관도 겨우 사약을 받는데 목숨 걸고 싸운 충청 수사는 망나니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되다니. 아무리 공자도 맹자도 모르는 무식쟁이들이라지만 도무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어. 그러나 끝까지 의연했다고 기록에 남은 충청 수사 강진흔은 목이 잘렸어. 그와 함께 참수된 사람은 강화도 갑곶을 지키던 하급 지휘관 변이척이었는데 둘의 공통점이 뭔지 아니? <조선왕조실록>에 가계(家系)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거야. ‘무슨 벼슬을 지낸 아무개의 후예요, 승지 벼슬을 한 아무개의 손자요, 어느 고을 사또 한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식의 소개 한 자락 없는, 양반치고는 별 볼 일 없는 흙수저였다는 얘기야. 인조가 강진흔을 두고 한 말은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란다. “강진흔은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나지도 못했다.”
새해가 되니 신문마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젊은이들이 흙수저 금수저 운운하는 것을 패배주의라고 나무라고, “하늘이 감동하도록 노력해봤나?”라는 얘기가 너무 많구나. 하지만 아빠는 강진흔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자고로 우리 역사와 사회의 문제는 흙수저의 피해의식이 아니라 금수저의 무책임이었음을 떠올려. 강진흔의 목이 쉽게 잘릴 때 김경징은 참 힘들게 사약을 받았고, 정작 군 총사령관으로 최정예 군대를 거느리고도 어슬렁거리기만 했던 김자점은 후일 영의정까지 올랐지. 이게 과연 조선 시대만의 일이었을까?
고위직 공무원은 관사 욕실에서 목욕하다가 죽어도 ‘과로로 순직’이 되는데 말벌통 제거하다가 말벌에 쏘여 죽은 소방관은 순직이 아니고, 침몰하는 배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고 달려갔던 선생님이 비정규직이라고 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또 다른 강진흔이 없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니. 정의가 의심받는 땅에서 희망이 어찌 건강할 수 있으며,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가 즐비한 틈에서 열 번 찍을 노력의 도끼가 어찌 날을 세운단 말이냐. “싸우지도 달아나지도 못했다”라고 강진흔을 타박하던 인조의 목소리를 아빠는 얼마 전 <내부자들>이란 영화에서 들었다. ‘족보 없는 검사’에게 부장검사가 내지르던 소리지. “그러게 잘했어야지. 잘 태어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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