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분노하는 대신 혐오하는가 - 박권일
선배 세대를 만나면 슬쩍 ‘헬조선’을 화제로 꺼내곤 한다. “우리 젊을 때는 더 힘들었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투정이냐” 같은 힐난이 아예 없진 않지만, 대다수가 공감을 표시한다. 젊은이들 참 열심인데 그만큼 보답받지 못한다고. 점점 살기 힘들어진다고. 그러면서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바꿔야지, 같이 들고일어나야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꼬기도 한다. “글쎄, 말로는 헬이다 지옥이다 하는데 잠잠하잖아? 아직 살만해서 그런 거 아닌가?”
‘아직 살만하니 저항하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에 동의할 수는 없다. ‘살만한 나라’의 자살률과 출산율이 이 지경이란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레토릭의 과격함이나 언론의 호들갑에 비해 현실의 움직임이 미미한 것은 사실이다. 언어가 격하다고 해서 봉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물론 없으나 담론과 실천 간의 이런 극단적인 비대칭은 확실히 기묘하다. 몇몇 사회적 원인이나 배경을 지적할 수 있을 테지만, 헬조선 담론이 무엇보다 혐오담론의 일종으로서 자국혐오론이라는 사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조선 담론이 내미는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는 헬조선에서 탈출, 즉 ‘탈조선’하는 것이다. ‘금수저’와 ‘능력자’ 같은 극소수만 쥘 수 있는 카드다. 나머지 하나는 ‘죽창’으로 서로를 찔러 죽이는 공멸이다. 이 죽창은 실제 무기가 아니라 대안 없는 절망의 물화된 상징이다. 다른 선택지, 예컨대 헬조선을 개선하거나 전복시키는 등의 방법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왜일까?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분노(anger)와 분개(indignation), 그리고 혐오(disgust)를 구별해 설명한다. “혐오는 자신의 몸 안과 밖이라는 경계와 관련이 있다. 그 감정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다. 이와 달리 분개는 부당함 또는 위해에 대한 사고가 중심을 이룬다.” 분노는 주체로 하여금 대상으로 다가가게 만든다. 논박을 하든 보복을 하든, 어쨌든 주체는 대상과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혐오는 다르다. 주체를 대상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린다. 동물적인 것, 열등한 것이 나를 오염시킬까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피하든가, 아니면 대상을 배제하거나 말소해야 한다. 요컨대 혐오를 다른 감정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다. 이 정동은 대상에 대한 개입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분노는 참여와 저항을 부르지만, 혐오는 도피와 방기로 이어진다.
여기서 쉽게 어떤 당위, 즉 ‘잘못된 일에는 분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질문을 던져보자. 왜 분노해야 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는가? 왜 오늘의 청년들은 잘못된 일을 “미개하다”고 하는가? 불평등과 부정의를 판단할 분별력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 판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의 시정을 체념했기 때문이다. 혐오해서 체념하게 된 것이 아니다. 체념을 합리화하기 위해 혐오가 동원된 것이다. 그 결과 사회 모순은 자연재해처럼 묘사되고, 나와 무관하게 발생한 사태로 타자화된다. 거기서 나는 내 몫의 책임을 짊어진 연루자가 아니라 재난의 일방적 피해자일 뿐이다. 지옥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데 나는 너무 혐오스러워 지옥에 손댈 수 없다. 그렇게 지옥은 날이 갈수록 더 끔찍해진다.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혐오라는 ‘증상’이 아니라 체념이라는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주체가 정치적 무력감을 극복하고 세계 속에 의미 있게 개입할 좌표를 찾아내는가라는, 식상하되 결정적인 질문의 답을 찾는 지난한 여정일 것이다.
-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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