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원면 대신리 금성대군제단(米院面 大新里 錦城大君祭壇)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당한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의 제단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제단 형태인 ㅁ자형이다. 규모는 앞면 3m, 옆면 4m, 높이 1m이다. 이 제단은 금성대군의 신단(神壇)으로, 그의 부인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전주최씨의 묘소 오른쪽에 있다.
전주최씨의 묘소는 대군의 차증손인 홍양정(洪陽正)이 개장(改葬)한 것으로 전한다.
이 제단은 축조 당시의 묘제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5년 8월 12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제단은 전주이씨 금성대군파 종중에서 소유하며, 관리는 후손들이 맡고있다[문화재청]
금성대군은 이름은 유(瑜). 아버지는 세종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1433년(세종 15)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일곱 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이유(首陽大君 李瑈)와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해 왕위를 선양받았다.
이듬 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 때 그도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해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그 뒤 1739년(영조 15)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에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외 6인의 종친에게 神主配享을 내린 일)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靑安)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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