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목 청어과 청어속의 바닷물고기.
성체는 길이가 20~38㎝, 외견이 정어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나 몸 측면에 방사형 융기선이 없는 점, 꼬리에 정어리 특유의 비늘이 없는 점, 옆구리에 검은 점이 없는 점 등으로 구별된다. 몸 빛깔은 담흑색에 푸른색을 띠고 있으나 배 쪽은 은백색이다. 대표적인 한해성 어류로, 3월 하순부터 수온이 4∼5℃ 가까이 올라가면 성숙한 성어는 깊은 바다에서 연안의 해조류가 무성하고 암초가 있는 얕은 연안이나 내만으로 떼를 지어 몰려오고, 그 곳에서 12월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산란한다.
성숙하는 데는 4년 정도 걸리고 수명은 20년 정도이다. 먹이는 플랑크톤성 갑각류이다.
무리지어 생활하며 개체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생태적으로는 상위 포식자들의 먹이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명 바다의 밀로 불리는 청어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는 엄청난 포획량 덕분에 근대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서는 인류의 주된 식량원 중 하나였다. 전 세계에 명물이 되어 남아있는 청어로 만든 보존식품들이 그 흔적이다. 우리나라의 과메기, 일본의 미카키니싱,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유럽의 훈제 청어와 청어 초절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바다 연안 전역에서 매우 많이 잡혀 비유어(肥儒魚/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로 불릴 정도로 값싸고 친숙하며 맛있는 생선이었다.
청어는 가히 조선에서 가장 인기있는 등푸른 생선이었는데 수 많은 등푸른 생선을 제치고 청어라는 이름을 이 물고기가 얻은 것이 바로 그 증거. 즉 우리 조상들에게 등푸른 생선의 표준은 어디까지나 청어였던 것이다. 고등어의 이름이 등이 높은(高登) 물고기가 된 이유도 청어에 비하면 체고가 높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청어죽은 보신재로 산후나 병후의 회복기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값도 싼 생선이라 어떤 선비는 '1냥에 청어 3뭇밖에 안 되는데 너무 비싸진 거 아니냐?'라고 하기도 했다. 참고로 1뭇은 10마리. 덤으로, 1냥의 가치는 어느 시대를 중심으로, 뭘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현대 기준으로는 2만원 정도.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는 한술 더 떠서 "청어는 옛날에는 극히 흔하였는데 고려말에는 감산되어 쌀 한 되에 청어 40마리밖에 주지 않았다"고 한탄을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청어잡이에 열중해 수천 마리의 청어들을 잡아 군사와 피난민들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한산도에 둔전을 일구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만 가지고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잡은 청어들은 주로 그냥 먹기보다는 말려서 먹었다. 청어의 내장에는 지방이 많아서 금방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 검소한 생활과 식사를 하라고 성직자들이 민중들에게 요구할 때 먹으라고 권장하던 것이 훈제 청어일 정도로 유럽에서도 흔하고 친숙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획량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큰 어종이기도 하다. 19세기 말까지는 어획량이 엄청나, 부산항에 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청어가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60년대부터 차차 줄어들어 7~80년대에는 1/100수준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원래 제철이어야 하는 연초 때의 어획량이 아예 0이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90년대들어 차차 늘고 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간 청어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산어보에도 이런 청어의 주기적인 이동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일각에서는 청어 회유로가 40년이 지날 때마다 바뀐다는 설이 있으므로, 다시 연근해가 청어 떼로 넘칠 날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나무위키
학명은 Clupea pallasii CUVIER et VALENCIENNES이다. 몸은 옆으로 납작[側扁]하고 아래턱이 돌출하고 있다. 몸빛은 등쪽은 담흑색에 다소 푸른 빛을 띠고 있고, 배쪽은 은백색이다. 비늘은 벗겨지기 쉬운 둥근 비늘이다.
생김새가 정어리와 아주 닮았으나 청어는 주새개골에 방사상 융기선이 없는 것, 옆구리에 반점이 없는 것 등이 다르다. 몸길이는 35㎝에 달하여 정어리보다 크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청어는 냉수성 어류인데 옛날에는 우리 나라 전연안에서 어획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土産條)를 보면 전도의 연안에서 어획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청어는 일찍부터 산업적 가치가 높은 물고기로서 도처에서 어획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迎日縣) 산천조의 주진(注津)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에 청어가 반드시 먼저 여기에서 산출되는데 진헌(進獻)한 뒤에 제읍(諸邑)에서 이를 잡기 시작하며 그 산출의 다소에 의하여 다음해의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고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청어를 많이 잡았다. 일례로서 ≪난중일기≫에 의하면 1595년(선조 28) 12월 4일의 일기에 “순천 2선(船) 낙안 1선을 군사 점검하고……황득중(黃得中)·오수(吳水) 등이 청어 7천여 급(級)을 싣고 오므로 김희방(金希邦)의 곡식 사러 가는 배에 세어 주었다.”는 구절이 있다. 청어를 잡아 군량미와 바꾸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광해군 때에 허균(許筠)이 지은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 의하면 “청어는 4종이 있다. 북도산(北道産)은 크고 속이 희다. 경상도산은 껍질은 검고 속은 붉다. 전라도산은 조금 작으며 해주에서 잡은 것은 2월에 맛이 극히 좋다.”고 하여 산지에 따라 청어가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徐有榘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 玆山魚譜≫ 등에는 청어의 회유로(洄游路)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청어의 회유에 관한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주목할만한 일이나 그 신빙성은 크지 않다. 서해산 청어와 동해산 청어는 각각 종족을 달리하는 독립적인 계통군에 속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과거 황해방면의 청어는 독립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며, 동해의 청어와 황해의 청어가 교류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수온이 특히 낮은 해의 겨울에 전라남도 연안을 통하여 동해의 청어가 황해에 침입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남해안산 청어의 서한(西限)은 경상남도 사천만 근처까지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흑산도 사람 장창대(張昌大)의 말을 인용하여 영남산은 척추골이 74개이고 호남산은 53개라고 하였다.
척추골 수가 이와 같이 차이가 컸다면 서해산 청어는 동해산 청어와 같은 계통군인 영남산 청어와는 상이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창대의 말은 믿기 어려운 데가 있고 척골 수의 계산에 있어서도 어떻게 계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제시대에 한 전문가가 동해산 청어의 척추골 수를 조사한 일이 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평균 53.85개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76년 11월 25일에 흑산도 근해에서 잡힌 청어의 척추골 수를 조사한 것을 보면 그것은 52개였다. 후자는 장창대가 말한 것과 거의 같은 수인 것이 흥미롭다.
청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 여러 곳에서 심한 자원변동을 보였는데 우리 나라 연해에 있어서의 청어도 그 자원이 다른 어류자원과는 달리 아주 심한 단기적 또는 장기적인 변동현상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는 청어자원변동에 관한 것이 종종 언급되어 있다. ≪중종실록≫ 6년 4월 정해조에는 서해안의 위도에는 예전부터 청어가 다산하던 곳이나 1506년(중종 1) 이후부터는 청어가 잡히지 않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는 봄철에 서남해에서 항상 다산하던 청어가 1570년(선조 3) 이후부터 전혀 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발생하였던 기이한 일들을 전하는 가운데,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고 점차 한강까지 이르렀으며, 원래 해주에서 나던 청어가 근 10여년 동안이나 전혀 나지 않고 요해(遼海)에 이동하여 나니 요동사람이 이를 신어(新魚)라고 일컬었다.”고 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우리 나라 연안 각처에서 잡히기는 하였으나 자원의 성쇠소장은 심하였다. 많이 잡힐 때에는 최다어획류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100여년 전에 심히 성하였다가 중간에 절산(絶産)되었는데, 1798∼1799(정조 22∼23)년에 다시 나타나 조금 흔하여졌다.”고 하였다.
같은 책에는 또 “대체로 해주에서 나는 것이 국중(國中)에 넘친다. 기미년(1799) 이후부터 20미를 엮어서 1급으로 하여 동전 2, 3문과 바꾸었다. 순조 때의 경인·신묘년(1830∼1831)간에는 1급의 가격이 40∼50문이었고 점차 등귀하였다. 헌종 때 을미년(1835) 이후에는 다시 점차 흔하여졌으나 기미년 이후만은 못하였다.”고 하여 청어자원의 변동과 이에 따른 가격 등락을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서해안의 청어자원은 곳곳에서 줄어들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해안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청어어장은 경상도의 동북연안으로 국한되었다. 일제시대에도 청어자원은 변동이 심하여 어장의 동점북천(東漸北遷)현상을 보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 초에는 부산·울산 등지에서도 청어가 잡히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산업적으로 청어어업이 성립될 수 있는 어장은 영일만 이북의 동해안으로 좁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획량은 어구·어법의 발달, 어업자수의 증가 등에 힘입어 증가추세를 보여 1911년에 약 3,000M/T에 불과하던 것이 1935년에는 약 5만M/T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는 감소추세를 보이다가 광복 직전에는 격감하여 사실상 청어어업은 중단되다시피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서해안에서 기선저인망과 기선건착망에 상당히 많이 잡히기 시작하여 1971년에는 근 7,000M/T이 잡혀 청어자원 회복의 꿈을 안겨주었으나 그 이후 다시 감소되어 근래에는 겨우 수백M/T이 어획되고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잡힌 청어는 황해의 저층 냉수에 군집하여 있는 것이었고 연안에 내유한 것이 아니었다.
청어어구는 조선시대에는 세망(細網)이라는 명주실로 만든 자망이 많이 사용되었고 서해안에서는 어전(漁箭)이나 중선망(中船網)·주목망(柱木網) 등으로 잡았다. 남해안에서는 정치망으로도 잡았고 동해안에서는 지인망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자망과 정치망이 많이 사용되었다.
청어는 일찍부터 관목(貫目)이라는 건제품으로 가공되어 많이 소비되었다. 또 주목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에 이미 연관목(烟貫目)이라고 하는 청어훈제품이 제조되고 있었다. 청어자원이 감소된 원인은 남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수온변화 등의 자연적 조건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본다.
과거 서해안 연안에 많이 내유하였던 것은 황해 냉수괴의 세력이 연안까지 미쳤음을 의미한다. 이는 해양물리학적 측면에서도 연구가치가 있다고 본다. 변동이 심한 청어자원이 다시 또 풍부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어는 청어과의 한해성 물고기이다. 몸은 늘씬하고 옆으로 납작하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다소 길며, 비늘은 떨어지기 쉬운 둥근비늘로 되어 있다. 몸길이는 35센티미터에 달한다.
청어의 대표적인 이칭은 ‘비웃’이다. 1527년에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청(鯖)자를 풀이하여 “비웃쳥, 속칭 청어(鯖魚)”라고 하였다.
비웃이라는 명칭이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문기의 『한국어도보(韓國魚圖譜)』에는 다음과 같은 이칭이 기록되어 있다. “동해안에서는 동어(東魚), 서울·경기·강원도에서는 비웃[肥儒: 가난한 선비를 살찌게 한다는 뜻]·구구대(크고 알을 가진 것), 전남 순천에서는 고심청어, 경북 포항에서는 푸주치·눈검쟁이, 경상도지방에서는 과미기·과목이(그대로 말린 청어)·과목숙국이, 울산에서는 갈청어·울산치”라고 불린다.
청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물고기로서 과거에는 한반도 연안의 전 수역에 분포하였다. 조선시대 지리서의 쌍벽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각 지방 토공(土貢)과 토산에 실린 청어를 보면, 조선시대 초기에 청어가 동서남해안에서 모두 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라도의 청어 산지는 모두 서해안 쪽에 있고 남해안 쪽에는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서해안산 청어와 동남해산 청어는 상호 교류하지 않는 상이한 계통군의 청어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쓴 정약전은 창대라는 흑산도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청어의 척추골 수가 영남산은 74개이고, 호남산은 53개라고 하였다. 양자의 계통군이 다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남산의 척수골 수는 많이 과장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한 조사에 따르면, 동해안산은 평균 54개였고, 해방후 흑산도 근해에서 잡힌 청어는 52개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청어는 우리나라 어류 가운데 자원이 가장 풍부한 것 중의 하나였다. 정약전은 “청어는 정월에 입포(入浦)하여 해안을 따라 회유하면서 산란하는데 무수한 청어가 떼를 지어 군래하면 바다를 뒤덮는다.”라고 하였다. 성숙한 청어는 3월 하순부터 수온이 4~5도 가까이 상승하면 깊은 바다에서 연안의 해조류가 무성한 얕은 곳 또는 내만에 내유(來遊)하여 산란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청어는 자원의 변동이 심하다.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따르면, 청어는 옛날에는 극히 흔하였는데 고려말에는 감산되어 쌀 한 되에 청어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며, 모로(牡老)는 시를 지어 이를 슬퍼하여 말하기를,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가 거치니 백물이 조모(凋耗)한 까닭으로 청어 역시 희소하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자원 변동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자원 변동이 심하였음을 전하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을 보면 중종 6년(1511) 4월 정해(丁亥)의 기록에 위도 주민은 어살[漁箭]을 설치하여 청어를 많이 잡아왔는데, 1505년 이후부터 청어가 불산하였는데도 세공은 여전하여 소득이 세공을 충당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변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실학자들의 저서에 변동의 구체적 내용을 밝힌 것들이 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청어는 1799년 이후부터 20마리를 엮어서 1급(級)으로 하여 동전 2~3문과 바꾸었는데, 1830~1831년에는 1급의 가격이 40~50문이 되어 점차 등귀하였고, 1835년 이후부터는 다시 점차 흔해졌으나 끝내 1799년 이후만은 못하였다고 하였다.
청어가 가장 많이 어획되던 서해안에서는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청어가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기호어(嗜好魚)였던 청어 어획량의 감소로 청어 공급이 부족하게 되자, 구한말에는 이를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하기까지 하였다.
청어 자원의 변동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면서부터 먼저 남해안에서 청어 내유가 중단되고, 이어서 경상남도의 동해안에서도 중단되어 청어 어장은 경상북도 이북 연안으로 한정되다시피 하였다. 해방 후에는 그곳에서도 청어가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청어 자원 변동의 원인은 태양 흑점설을 비롯하여 몇 가지가 있으나, 자연조건의 변화에 의한 것임은 틀림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 주진(注津)의 기사를 보면 매년 겨울에 청어가 산출되면 먼저 진헌한 뒤에 제(諸) 읍에서 이를 잡기 시작하는데, 그 산출의 다소로써 그해의 풍흉을 점친다고 한 것이 있다. 청어 어황과 농작물의 풍흉이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청어 주산지였던 홋카이도의 요이치(余市)에서는 사과가 풍년이면 이듬해 청어 어획량이 증가하고 그 반대는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또 같은 지방의 미곡 작황은 청어 어황과 역상관관계를 보인 때가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연안 수온의 상승이 한해성 청어의 연안 내유 중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서해안에서도 청어가 잡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서해 저층의 냉수괴(冷水塊)에서 잡힌 것이었다. 청어 자원 변동의 역사적 연구는 해수 온도 변화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청어는 명태, 조기 같이 대량으로 어획되어 대중이 많이 소비하는 다획성 대중어(大衆魚)의 하나였다. 어구 어법의 발달로 일제강점기에도 상당히 많이 어획되어 1932년에는 어획량이 7만 톤을 초과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어획량이 격감하여 청어는 고급어가 되다시피 하였다. 1971년에는 7천 톤 가까이 어획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주로 서해 저층의 냉수괴에서 잡힌 것이다.
어구는 조선시대까지는 발 어구인 어전(漁箭)과 방렴(防簾)을 비롯하여 어장(漁帳)이라는 정치망, 세망(細網)이라는 자망, 후릿거물[揮罹網], 주목망(柱木網), 중선망(中船網), 선망의 일종인 거휘리(擧揮罹) 같은 망어구를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정치망과 함께 기선건착망(機船巾着網)을 사용하였다. 해방 후에는 기선저인망이나 기선건착망으로 냉수괴의 청어를 잡았다.
청어는 가의(嘉儀) 때 수요가 많고 특히 설날과 정월에 많이 소비되었는데, 생선으로 소비된 것도 많았으나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가공품으로 많이 제조되었다. 청어를 그대로 말린 소건품(素乾品)이 많았는데, 이를 관목(貫目)이라 하였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 보면 “관목은 오래도록 부패하지 않고 멀리 수송할 수 있는데 어획 후 곧 배 위에서 말린 것이 좋다고 하였고, 또 이를 통속적으로 관목이라고 하는데, 양 눈에 새끼를 관통할 수 있을 것 같으므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주목을 끄는 것은 훈제품(燻製品)의 제조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청어를 연돌에서 연기를 쐬어 부패를 방지하는데, 이를 연관목(煙貫目)이라 한다.
유럽에서 인기 있는 청어 훈제품이 우리나라에서도 19세기에 제조되었다. 이와 같은 건제품 외에 염장품, 젓갈로도 가공되었다.
조리한 청어는 청어구이, 청어지짐이, 청어저냐, 청어백숙, 청어죽, 청어찜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는 청어는 구워 먹으면 아주 좋다고 하였다.
-출처: 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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