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활용한 여러 도구들
구석기의 주먹도끼나 긁개등을 보면 문화는 돌과 더불어 싹이 텄음직하다.
인간은 삶을 더 낫고 편하게 성취하려는 뜻을 갖는다.
빈 손은 약하지만 그 손이 도구를 들면 강해진다는 인간의 생각이 자연을 활용하려고 한다.
돌밭에 있는 돌맹이는 그냥 있는 자연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돌 하나를 주워 들고 날아가는 새를 잡기위해 돌팔매질을 한다면 순간 날아가는 돌맹이는 이미 자연이 아니라 문화가 된다.
이처럼 문화는 사람의 뜻에서 생기고 자란다.
문화를 향한 우리의 뜻은 자연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물질의 지식이 축적되면서 우리는 자연을 무시하고 파괴하기를 꺼리지 않게 되었다.
온갖 공해를 빚어내는 물질의 범람이 그런 증세이다.
이를 극복하자면 삶의 지혜를 낳는 자연과의 친화력을 복원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도 '돌맹이의 생활정서' 가 새삼스럽다.
'불돌.부싯돌.구들돌.온돌' , '물돌.숫돌.풋돌.몽돌' , '돌팍.김칫돌.다듬돌.빨랫돌.돌확.맷돌' 등이 내 마음 속에 있는 세 갈래의 '돌맹이의 문화유산' 이다.
이 유산은 '돌맹이의 생활정서' 로 새겨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생활을 편리하고 이롭게 해주었던 돌맹이에다 의미와 가치를 얹어주고 살았던 소박한 심정은 우리를 관류하는 생활정서의 한 숨결이다.
정서의 숨결 속에 문화의 밑그림이 감춰져 있는 법이다.
하지만 위에 열거된 돌맹이의 용도들이 전국에 걸쳐 두루 생활화되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서부 경남 한 산골에 촌락을 이루고 살았던 사람들이 돌맹이의 쓰임새에 따라 여러 이름을 붙여주었던 생활의 정서를 떠올려 두고 싶다.
그런 정서가 자문화 (自文化) 의 바탕 그림이 될 것이다.
'불돌.부싯돌.구들돌.온돌' 등은 주로 돌과 불을 함께 활용한 지혜였다.
불돌은 삼상굿과 닥상굿에 썼던 자갈들이다.
상굿은 수증기를 쏘여 초목 (草木) 의 껍질을 쪄서 벗기는 방법이다.
삼상굿은 삼 껍질을 벗기고 닥상굿은 창호지를 만들 닥 껍질을 벗긴다.
상굿은 물가에 아궁이를 만들고 아궁이 위에 한 섬의 자갈을 묻고 그 바로 뒤켠에 삼이나 닥 묶음 다발을 쌓은 다음 가마니를 덮고 진흙을 이겨 두툼하게 발라 얹어 흙움을 쌓아 만들어진다.
그런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질러 한나절쯤 자갈을 달군다.
그렇게 달구어진 자갈을 불돌이라 불렀다.
불돌에 물을 붓는 일을 대알을 튼다고 했다.
대알을 트면 불돌에서 폭발하는 수증기가 상굿 고래를 타고 뒤켠 삼단 속으로 배어들고, 삼껍질은 쪄 익혀져 쉽게 벗겨낼 수 있게 된다.
상굿이 끝나고 나면 불돌은 다시 자갈로 되돌아가 자연이 되었다.
부싯돌은 오늘날 라이터 구실을 했다.
부싯돌은 산 비탈에서 찾아낸 차돌 조각이다.
쑥을 부벼 섶을 만들어 부시로 차돌을 쳐서 불을 만들었다.
부싯돌을 돌성냥이라고도 했다.
산 꼭대기에 묻혀 바짝 말라 있던 차돌이어야 불똥을 많이 내는 좋은 부싯돌이 됐었다.
그런 차돌 부싯돌을 귀하게 여겼다.
구들돌은 온돌방의 고래를 덮는 넓적한 편석 (片石) 을 말한다.
구들돌은 산 비탈 너럭에서 캐내 썼다.
두툼한 구들짝은 방바닥 아랫목 구들 고래를 덮었고 얇은 것은 웃목을 덮었다.
구들돌 위에 황토를 한치 정도 덮으면 온돌방 바닥이 되므로 구들돌은 방바닥 밑에 있는 불고래를 덮는 깔개 돌인 셈이다.
덫 놓는 한 겨울이 오면 덫꾼들은 화롯불에 따끈하게 데운 돌맹이를 헝겊에 싸서 옷 소매 속에 넣고 산을 탔었다.
그 돌을 온돌이라고 불렀다.
냉기를 막아주는 토시 구실을 해서 그렇게 불렀다.
온돌은 주먹만한 크기였고 온기를 한 나절은 족히 보존했었다.
겨울 산바람에 손.발이 얼어 저리면 옷소매에서 온돌을 끄집어내 손.발을 문질러 살 속에 밴 얼음을 녹여 뺀다고 했었다.
'물돌.숫돌.풋돌' 등은 돌과 물을 연결시켜 생활을 편하고 이롭게 한 지혜였다.
물돌은 산골 논다랑이 벼농사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다.
논다랑이에는 물이 들고 나는 물꼬가 있다.
그 물꼬에 얹어 놓는 돌덩이가 물돌이다.
물돌은 가로가 세로보다 긴 네모꼴로 두부 한모 크기였다.
산골 물은 차가워서 한 낮에 물을 가두어 햇볕에 데워야 한다.
물을 데우는 일을 물돌이 했다.
낮에는 물돌이 가로로 물꼬에 얹혀서 물 흐름을 막았고, 밤이면 물돌이 세로로 들려져 물꼬가 터지면 데워진 물이 밤새에 넉넉히 흘렀다.
이런 물돌은 아침저녁으로 조절되었다.
물돌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큰 소리칠 농부가 된다고 했다.
숫돌은 낫을 갈아 날을 세우게 하는 돌팍이다.
숫돌은 석질이 단단치 않아 곱돌같이 부드럽고 길쭉한 혓바닥처럼 생긴 돌팍이다.
논.밭 두렁 위 잘 보이는 곳에 얹어 두고 누구이든 낫질을 하다 낫이 무뎌지면 숫돌로 날을 세웠다.
야지 (野地)에서는 숫돌을 사서 썼다지만 산중에서는 산천에서 어렵사리 주워 썼다.
숫돌을 깨면 망할 놈이란 욕을 먹었다.
풋돌은 아낙들이 소중히 여겼던 돌이다.
보리나 밀 껍질을 벗기려거나 콩.팥.녹두.조.수수 등 온갖 낱알을 갈거나 풋고추 따위를 짓이기려면 아낙은 풋돌을 들고 확질을 했었다.
돌확과 맷돌은 요새로 치면 믹서였고 풋돌은 믹서의 날인 셈이다.
풋돌은 흔히 남편이 주워다 주었다.
그래 아낙이 풋돌을 주우면 과부된다는 속담이 생겼다.
아낙이 화가 끓어 속앓이를 할 때면 속에서 불이 난다고들 했다.
속앓이 병을 홧병 (火病) 이라고 불렀다.
불에 달군 돌덩이가 홧병을 다스린다고 상상했다.
이열치열 (以熱治熱) 의 이치에 따라서이다.
아낙이 홧병이 나면 풋돌을 가져다 아궁이 불 속에 집어넣어 따끈하게 데웠다.
그러한 풋돌을 몽돌이라고 불렀다.
아낙은 그 몽돌을 헝겊에 싸서 가슴팍에 얹어 두고 울화를 다스렸다.
아낙네의 울화병이 나으면 몽돌은 다시 풋돌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돌맹이로 돌아갔다.
'돌팍.김칫돌.다듬돌.빨랫돌' 등은 돌맹이를 활용한 가구들이다.
돌이 둥글면 돌맹이, 넓적하면 돌팍이라고 불렀다.
부뚜막의 돌팍은 제법 넓적한 돌판이었다.
파.마늘.부추.산초.박하 등을 다지는데 쓰이는 양념 도마인 셈이다.
생김새 따라 적절히 이용 김칫돌은 김장을 한 다음 김치 포기들이 들뜨지 않게 하여 양념이 골고루 잘 배어들게 하려고 고르게 누름질을 하는 무겟돌이다.
이런 돌팍이나 김칫돌은 아낙들이 직접 물가에서 줍는다.
사내가 김칫돌을 주워다 주면 치마끈에 묶였다고 입질을 했다.
그러나 다듬돌과 빨랫돌은 남정네들이 마련해 주었다.
다듬돌은 쇠소리가 날만큼 단단하고 두툼하면서 네모 반듯한 청석이나 오석이어야 했다.
다듬돌은 줍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 좋은 다듬돌을 줍게 되면 딸 시집 보낼 때 물목 (物目) 감이라고 자랑했었다.
빨랫돌은 냇가에 두고 마을 아낙들이 함께 썼었다.
물이 굽이쳐 잘 흘러내리는 물목에 빨래터를 잡아 면이 넓고 반반하면서도 꺼칠꺼칠한 돌바닥을 비스듬히 앉혀 놓으면 빨랫돌이 되었다.
빨랫돌이 단단히 놓여야 아낙들의 입질을 피할 수 있었다.
빨랫터에 놓인 빨랫돌이 제대로 놓이질 않아 흔들거리면 나이든 아낙들이 험담을 뱉었다.
"불알 찼다고 빨랫돌도 덜컹인다" 고. 위에 든 것 말고도 생활 속으로 젖어든 돌의 역할은 많았다.
섬돌.댓돌.마당돌.돌담.징검다리 등도 생활 속의 돌들이다.
위에서 살펴 본 돌들은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생활을 편하게 하고 이롭게 한 지혜의 산물들이다.
특히 산천의 물을 건네주는 징검다리를 바라보면 우리네 생활 정서가 자연과 통정 (通情) 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생활정서는 자연을 삶의 둥지로 삼아야 한다는 친화력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런 정서는 생활 속에 들어와 있었던 돌들의 쓰임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우리에게 값진 문화유산은 무엇일까? 어떤 유물보다 자연과의 친화력을 쌓았던 우리의 생활정서가 품은 정신일 것이다.
그 정신을 타야 우리 문화도 건전하게 발전할 것이다.
- 윤재근 <한양대 교수·문학평론가>/[내마음속의 문화유산]32.돌을 활용한 여러 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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