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절의 뜻을 사전식으로 풀이하면 ‘몸을 굽혀 경의를 표하는 인사’가 된다. 다시 말하면, 경의라는 심상을 몸을 굽힌다는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절을 나타내는 한자는 ‘拜(배)’인데 《설문해자 說文解字》의 단주(段注)에 ‘머리를 손에 대는 것’이라 하여 땅을 짚은 손에 머리를 대고 절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설문통훈정성 說文通訓定聲》·《주례 周禮》에는 경용(敬容)의 총칭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절을 통틀어 일컫고 있다. 절이란 상대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곧, 절을 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사람 사이에서 절은 행해지는 것이다.
생활과 절
절을 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는 상하의 관계이다. 이것은 다시 공적인 경우와 사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공적으로는 사회적 계급·계층 또는 지위·위치에 따라 상하가 구분된다. 사적으로는 가족이나 친족집단 안에서의 항렬·세대·연령 등으로 상하가 구분된다.
공적인 상하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높은 신분과 낮은 신분,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사적인 상하관계는 항렬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윗세대와 아랫세대, 연상자와 연하자,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절이라는 행위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계속 확인하고 유지한다.
만일,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면 양자의 관계는 물론 사회체제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절은 사회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행위규범으로서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으로 강요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절을 필요로 하는 인간관계 뒤에는 생활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 은혜에 대한 감사의 감정이 개재된다. 공적으로 지배자에게는 나라를 다스려주거나 높은 자리를 마련해준 데 대한 감사, 신분·계급·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아랫사람을 편안하게 돌보아준 데 대한 감사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사적으로 부모에게는 낳아서 길러준 은혜, 존장·스승에게는 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준 은혜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생활조건을 바탕으로 은혜라는 감정이 절이라는 행위로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러한 조건으로 우선 계층분화현상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계층분화는 대체로 청동기시대에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상당한 인원을 동원, 사역할 수 있는 힘의 소유자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지석묘가 이 시기의 대표적 유물이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세습되었을 정치적 지배자에게 어떤 존경을 표하는 행위로서 절이 생겼을 것이다.
사적으로는 정착농경생활과 사유재산으로서의 집과 농토, 그리고 생활도구를 제작하는 지식이나 기술의 독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은 그 뒤 부족연맹체의 등장과 함께 일상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철기문화의 발달, 더 나아가서는 고대국가의 형성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미 고조선시대에 8조목의 법률이 통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것을 통해 당시의 사회가 원시적 씨족사회를 벗어나서 발달된 생산력을 기초로 한 사유재산제도와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농토의 상속과 기술 또는 지식의 전수가 이루어지면서,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은혜의 감정이 생기고, 그 은혜가 절이라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기반 위에서 중국의 고도로 체계화한 유교적 윤리도덕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유교 윤리가 절이라는 행동과 함께 생활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은혜관계는 시혜자의 생존 중에만 유지된 것이 아니라, 사후에까지 존속되어 제례(祭禮)라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죽어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조상 외에도 초자연적 존재인 신에게도 배례한다.
신도 산 사람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는 인격체로서 인간과 영적으로 교통한다고 인식했으므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존경을 표하듯이 절을 했던 것이다.
신은 초자연적 권능으로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에 대한 관념은 종교마다 다르고 그에 따라 절의 형태도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 민간신앙이나 무속에서는 ‘비손’을 하면서 신을 대하는 데 비해 유교·불교에서는 ‘절’을 하면서 신을 섬긴다. 굿을 할 때 무당이나 대주(大主) 또는 계주(季主)는 결코 신 앞에 꿇어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절은 하지 않는다.
다만, 선 채로 허리를 굽히며 손을 비비거나 꿇어앉아서 머리를 숙이며 손을 비비는 것이 고작이다. 이러한 때 손을 비비는 것이 ‘비손’인데, 무서운 존재인 신에게 애원하는 동작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합장배례를 하고, 유교에서는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배례를 한다. 이 경우에는 무서운 대상에게 빈다는 관념에서가 아니라 존경의 대상에게 산 사람에게 하듯 절을 하는 것이다.
절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절이 언제 비롯되었으며 그 원초적인 형태가 어떠했는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문헌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회사적 측면에서 보면 멀리는 청동기시대, 가까이는 고대국가의 성립시기에 어떤 형태로든 절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초기의 절은 중국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비손’에서 그 원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문헌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절의 형태는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나오는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호랑이와 곰이 같은 굴에 살면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신웅(神雄)에게 빌었다는 대목의 ‘빌다[祈]’라는 말과,
다시 사람의 여자로 화한 웅녀(熊女)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고 원하였다[呪願]’는 말은 바로 ‘비손’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청동기문화 초기에 단군신화가 성립되었으리라고 보는 학계의 견해에 따른다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는 지배자 아래에 사회계층의 문화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행해졌을 초기의 절은 비손의 형태에서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부여·고구려 등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차 변화했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외교적 의례가 행해짐에 따라 중국 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기 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의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로써 위협해 가서 우거(右渠)를 타이르게 하니, 우거가 사자를 보고 돈수(頓首) 사죄하고 항복하기를 원하였다.”에 중국 절의 한 형태인 돈수가 나타나 있다.
이 밖에도 《한서 漢書》·《후한서 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 등에도 우리 나라에서 중국 절이 행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이 전한다.
예컨대, 배작(拜爵)·읍양(揖讓)·제천(祭天)·내헌현(來獻見)·공헌(貢獻)·내조(來朝)·조하공헌(朝賀貢獻)·봉장공헌(奉章貢獻)·궤배예일각(跪拜曳一脚)·사귀신(祠鬼神)·세시조하(歲時朝賀)·조알(朝謁)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중국과 인접했거나 보다 가까운 부여·고구려·예 등에서는 일찍부터 중국과의 외교의례에서 중국식 절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절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제도로 묘제(廟制)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는 121년(태조왕 69)에 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묘(太后廟)에, 168년(신대왕 4)에는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각각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서는 2년(온조왕 20)에 단(壇)을 설치해 천지에 제사했고, 29년(다루왕 2)에 시조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는 6년(남해차차웅 3)에 시조 혁거세묘(赫居世廟)를 세우고 사시에 제사를 지냈는데, 왕매(王妹) 아로(阿老)로 하여금 주제하게 하였다. 25년(유리왕 2)에는 시조묘에 친히 제사했다는 등의 기록이 계속 나타나 있다. 가락에서는 시조묘에 제사했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에 보인다.
이러한 묘제는 신라의 경우 후기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더 복잡해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10년(소지마립간 9)에 시조탄강지(始祖誕降地)인 내을(奈乙)에 신궁을 세우고 제항을 올렸으며, 776년(혜공왕 12)에 오묘(五廟)를 세우고 1년에 6번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이 오묘제는 《예기》 왕제편(王制篇)에 태조는 직계시조와 고조인 4대조까지 모두 5조를 모시도록 되어 있다. 오묘제는 그 뒤 여러 가지 변화를 보였으나, 어떻든 오묘제와 함께 그 절차 속에 중국식 절의 형태가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이후 유학의 적극적인 장려는 중국의례의 보급을 더욱 재촉했을 것이다.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을 세우고, 717년(성덕왕 16)에는 대감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 및 10현철 72제자의 화상을 가지고 돌아와 대학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학의 교육과정 가운데에는 《예기》·《효경》 등이 포함된 것으로 미루어서도 중국식, 그 중에서도 유교식 절이 성행되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절의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의 경우 고분벽화를 통해 그 편모를 엿볼 수 있다. 수산리고분·감신총(龕神塚)·쌍영총(雙楹塚)·덕흥리고분 등이 그것이다.
수산리고분의 동벽화에는 서 있는 남자 앞에 다른 남자가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 무릎을 모아 꿇은 채 허리를 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앞에 있는 남자가 공수궤배(拱手跪拜)하는 것인데, 절하는 사람이 소년처럼 보이므로 승천하는 고인을 그 자손이 송배(送拜)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감신총의 전실 북벽의 입구 왼쪽에는 세 사람이 평상 위에 꿇어앉아 있는 그림이 있다. 맨 앞의 사람은 남자로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허리를 편 채 앉아 있고, 뒤의 두 사람은 여자로서 모두 허리를 편 채 두 손에 무엇인가를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맨 앞 사람은 수산리고분의 경우처럼 절을 하는 모습같이 보인다.
쌍영총의 주실 북벽의 부부상 오른쪽의 그림에 보이는 인물은 바지를 입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 앞쪽에 모으고 허리를 펴고 있으나 양 무릎을 벌리고 있는 점이 앞 그림들과 다르다.
덕흥리고분에는 주인공의 오른쪽에 13군의 태수들이 서 있고, 그 중 맨 앞 사람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의 인물 자세를 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적어도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모습으로서 절의 한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유교의 영향과 함께 불교의 수용은 신도들 사이에 불교식 절을 보급시켰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백제에서는 384년(침류왕 1)에, 그리고 신라에서는 527년(법흥왕 14)에 각각 불교가 공인되어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퍼져갔다.
불교의 전파와 함께 수용되었을 불교식 절은 점차 서민층에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왕가의 특별한 보호 밑에 매우 성행했으므로 불교의 일반화와 함께 불교식 절도 보편화했을 것이다.
한편, 유교는 고려시대의 사학기관(私學機關)이나 사당(祠堂), 조선시대의 성균관이나 향교 및 서원을 중심으로 양반계층에서 성행했고, 서민층에서도 주자의 《가례 家禮》에 따른 관혼상제의 의례가 행해진바 이에 따라 유교식 절이 보급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나 의례에 따른 여러 형태의 절과 함께 무속에서의 ‘비손’도 무당이나 민간신앙을 통해서 현재에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유가(儒家)의 절
중국의 절은 유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므로 이것을 유가의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특히 주자학을 지도이념으로 수용하면서부터 조선시대에는 유가의 절을 설명한 《가례》는 일상생활의 예절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절에 관한 문헌들은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정구(鄭逑)의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 중의 〈잡례 雜禮〉,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 家禮輯覽》 중의 〈도설 圖說〉, 유장원(柳長源)의 《상변통고 常變通攷》 중의 〈통례 通禮〉·〈거가잡의 居家雜儀〉, 손여제(孫汝濟)의 《예서유편 禮書類編》 중의 〈거가잡의〉, 김재홍(金在洪)의 《상변축사유집 常變祝辭類輯》 중의 〈거가잡의〉,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중의 〈인사편 人事篇〉·〈논예문 論禮門〉등에 절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이 밖에도 김성일(金誠一)은 《동자례 童子禮》를 지어 어릴 적부터 절에 익숙해지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들 문헌에 나타난 설명을 중심으로 유가의 절을 그 자세에 따라 나누면, 차수(叉手)·읍(揖)·궤(跪)·배(拜)의 4단계가 된다.
① 차수란 절의 첫 단계로서 손의 처리방법이다.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김성일의 《동자례》에 따르면, 차수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엄지를 단단히 잡아 왼손의 새끼손가락이 오른손목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의 나머지 네 손가락을 편다. 왼손의 엄지를 위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덮듯이 하나 직접 가슴에 닿지 않고 두 세치 떨어지게 한다.
이익의 《성호사설유선》에는 위와 같은 설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덧붙어 있다. 곧, 이렇게 하여 오른손의 네 손가락도 모두 곧게 펴서 집게손가락이 왼손의 바깥 손목뼈 아래에 닿도록 하여 네 손가락이 밖으로 향하도록 힘을 준다.
왼손의 집게손가락은 또한 오른손의 손목뼈에 닿도록 하여 네 손가락이 안을 향해 거두어지도록 한다. 양손의 엄지손가락은 엇물려 단단히 힘을 주어서 서로 의지해 풀어지지 않도록 한다.
② 읍에 대해 김장생의 《가례집람》 중의 〈지읍도 祗揖圖〉에는 〈사림광기 事林廣記〉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읍을 할 때에는 다리를 조금 벌려 편안하게 선다. 몸을 굽혀 허리를 낮추고 눈은 자기의 신발코를 보며 위의를 갖추어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 손은 거의 무릎에 닿도록 하나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양 무릎 사이에 넣도록 한다. 어른 앞에서 읍을 할 때에는 손은 무릎 아래로 내린다. 읍이 끝나면 적당한 때 몸을 일으켜 손은 차수한 채 가슴 앞에 둔다.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소매 밖으로 엄지손가락을 내놓도록 한다. 이것을 선례(鮮禮)라고 하는데, 어른을 뵐 때 하는 예가 아니다.”
그리고 같은 책의 〈읍례도 揖禮圖〉에는 읍의 종류를 상례·중례·하례로 갈라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상례는 지위가 낮은 사람이 어깨를 낮추어 몸을 굽히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눈밑까지 올려 최상의 존경을 표하는 것인데, 이 때 읍을 받는 사람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간에 답을 하지 않는다.
중례는 지위가 낮은 사람이 몸을 굽히고 손을 모아 입까지 들어서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하례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 손을 가지런히 하고 가슴까지 올려서 답례하는 것이다.
③ 궤는 《동자례》에 따르면 머리를 낮추고 손을 마주잡고 편안한 자세로 양 무릎을 아래로 내린다. 허리는 곧게 세워 쭈그리지 않도록 하여 꿇어앉는다. 등은 조금 굽혀 공경을 표시한다. 이 궤는 절의 한 절차일 뿐만 아니라 어린 사람이 어른을 모시는 일상예절이기도 하였다.
④ 배는 갈래가 많고 복잡하다. 《주례》의 대축(大祝)에는 절의 종류를 9가지로 가르고, 그 중 4가지는 정배(正拜)이며, 나머지 5가지는 정배에 따라서 행한다고 그 소(疏)에 설명되어 있다. 남자의 정배는 계수(稽首)·돈수·공수(空首)의 세 가지가 있고, 부인의 정배는 숙배(肅拜)라고 하였다.
이 밖에 진동(振動)·길배(吉拜)·흉배(凶拜)·보배(褒拜)는 계수에 따르고 기배(奇拜)는 공수에 따른다. 정배 중 공수는 1배(拜)이고, 나머지는 모두 2배이다. 숙배는 재읍(再揖)이라고도 한다.
첫째, 계수는 절을 하고 머리를 땅에 대는 것이다. 먼저 양손을 마주잡고 땅을 짚은 다음 머리를 땅에 대었다가 떼고 또다시 땅에 대고 오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주자는 손을 뒤집어서 머리를 땅에 닿도록 하는 것이라 하고, 《가례집람》에는 절을 하면서 이마를 내려 손에 닿도록 하고 엎드려 오래 있는 것인데, 때에 따라 몸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하가 임금을 뵙는 것은 계수 5배로서, 먼저 계수 4배를 한 다음 고두(叩頭) 1배를 하고, 동궁(東宮)을 뵙는 예는 계수 4배만 한다고 하였다.
둘째, 돈수는 절을 하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이다. 먼저 양손을 마주잡고 땅을 짚은 다음 머리를 손에 대었다가 곧바로 머리를 드는 것인데, 이것은 지위가 같은 사람끼리 서로 절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어류 語類》에는 절을 하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것이라 하고, 주자는 머리를 손 위에 조아리는 것이라 하였다. 또, 《가례집람》에는 문무백관이 품계에 따라 돈수재배를 하는데, 하관은 아래에서 돈수재배를 하고 상관은 위에서 공수재배로 답례한다 하고, 또 친척 중의 제일 웃어른이나 스승을 뵐 때 또는 노비가 주인을 뵐 때에는 돈수 4배하고 친척간에는 항렬에 따라 돈수재배한다고 하였다.
셋째, 공수는 배수(拜手)라고도 하는데, 먼저 양손을 마주잡고 땅을 짚은 다음 머리를 손에 닿도록 한다. 땅에 대지 않으므로 공수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답하는 절이라고 하였다. 《가례집람》에는 관품(官品)이 같거나 평교끼리 서로 만나면 공수재배한다고 하였다.
넷째, 진동은 무섭거나 두려워서 몸을 떨고 안색이 변하듯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섯째, 길배는 절을 한 다음 이마를 숙이는 것으로서, 상례(喪禮)의 자최(齊衰)·부장기(不杖朞) 이하에 있는 사람을 길자(吉者)라고 하므로 이들이 하는 절을 말한다고 하고, 먼저 돈수를 하고 이마를 숙이는 것이라 하였다.
《어류》에는 먼저 양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린 다음에 머리를 풀어 앞을 향해서 땅을 두드리는 것이라 하고, 이마를 숙인다는 것은 이마를 제자리로 돌리면 돈수가 되므로 이마를 땅에 대었다가 얼굴을 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류》에는 길배가 곧 지금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절이라고 하였다.
여섯째, 흉배는 먼저 이마를 숙이고 나중에 절을 하는 것으로, 3년복을 입은 사람이 하는 절이다. 《어류》에는 양손을 벌린 다음 머리를 먼저 땅에 두드리고 손을 뒤집어 보통과 같이 하는 것으로, 이것이 곧 상배(喪拜)라고 하였다.
일곱째, 기배는 1배로서 신하에게 답하는 절이다. 두자춘(杜子春)은 먼저 한 무릎을 꿇는 것으로, 지금의 아배(雅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다.
여덟째, 보배는 재배로서 신(神)이나 시신(屍身)에게 하는 절이며, 보(褒)란 보답하는 뜻이라 하였다.
아홉째, 숙배는 다만 머리를 숙이고 손을 내리는 것으로 의(○)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다. 〈단주 段註〉에는 무릎을 꿇어앉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은 채 다만 무릎을 굽혀 머리를 들고 손만 아래로 내리는 것이라 하였다.
또, 소(疏)에는 절 가운데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군중(軍中)에서 행해지고 부인들은 이것을 정배로 삼는다고 하였다. 주자는 양손을 마주잡고 땅에 닿도록 내리는 것이라 하였다.
《어류》에서는 양 무릎을 가지런히 하여 무릎을 꿇고 손은 땅에 댄 채 머리는 아래로 내리지 않는 것이라 하고, 이어서 부인의 절은 숙배·배수·계상(稽顙)이 있는데, 숙배는 양 무릎을 땅에 꿇고 손을 낮게 내리는 것이고, 배수는 역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대는 것이며, 계상은 머리를 땅에 대는 것으로 남편이나 맏아들이 죽었을 때 하는 절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성호사설유선》에는 남자에게 하는 절로서 협배(俠拜)가 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재배한 다음 남자의 재배를 받고 여자가 다시 재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열거한 중국의 절, 곧 유가의 절은 여러 설명을 통해서 그 대강을 짐작할 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는데, 그나마 시대에 따라 형식상의 변화도 있었던 것 같다. 《가례집람》에는 이 밖에 고두라는 것을 따로 설명하고 있는데, 손을 각각 떼어서 땅을 짚고 머리를 땅에 세 번 댄다고 하였다.
한편, 《가례집람》에는 그 전배도(展拜圖)에서 절을 하는 방법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랫사람이 절을 하는 법은, 먼저 읍을 하고 조금 물러나서 다시 한번 읍을 한다. 이어서 부복해 양손을 가지런히 하여 땅을 짚고 왼쪽 무릎을 꿇고 다음에 오른쪽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일어난다.
일어날 때에는 먼저 오른쪽 다리를 일으키고 두 손을 가지런히 하여 무릎에 댄 다음 왼쪽 다리를 일으킨다. 이어서 두 번 절을 하고 서서 앞으로 다가가 일기의 춥고 더운 인사를 아뢴 다음 조금 물러서서 읍을 한다. 그리고 또다시 두 번 절을 하고 그동안 소원(疎遠)한 인사를 아뢰고 축하나 위로의 말을 나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 네번 절을 한 다음에 일기를 말해도 된다.
《동자례》에는 위와 같은 내용 외에 그 의도(儀度)를 명확하고 천천히 해야 존경하는 것이니 급박하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어서 어른에게 4배, 평교간에는 재배한다. 예에 지존(至尊)이 아니면 계수를 하지 않는데, 지금의 고두례가 곧 계수이다. 이것을 세속에 따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석을 달았다.
불가(佛家)의 절
《불학대사전 佛學大辭典》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부처에게 하는 절의 절차를 12단계로 설명한다.
① 양손을 가슴 앞에 합장해 포단(蒲團 : 방석 같은 앉는 자리) 앞에 선다. 합장이란 열 손가락을 모아 내 마음이 하나로 되어 있음을 나타내보이는 경례법이다.
② 합장하였던 상태에서 오른손을 떼어 내려 손바닥을 포단의 중앙에 대고 양 무릎을 포단에 꿇는다. 이것을 일파(一把)라고 하는데, 이 때 왼손은 움직이지 않고 가슴 앞에 세워둔다.
③ 왼손바닥을 포단의 왼쪽 가에 댄다. 이것을 또 일파라고 한다.
④ 오른손바닥을 포단의 중앙으로부터 포단의 오른쪽 가로 옮긴다. 이것을 반파라고 하는데, 그래서 절을 일반에서는 양파반(兩把半)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양손은 여섯치 가량 서로 떨어지게 한다.
⑤ 머리를 양손의 중간인 포단의 위에 댄다.
⑥ 양손바닥을 뒤집어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한다. 부처의 생존시에는 양손을 부처의 발에 대었으므로 그것을 두면예족(頭面禮足)이라고 부른다.
⑦ 두 손을 주먹쥐고 뒤집어 포단에 댄다.
⑧ 머리를 포단에서 뗀다.
⑨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을 포단 가운데로 옮긴다.
⑩ 왼손을 펴서 손바닥을 포단에서 떼어 가슴 앞에서 합장하는 자세와 같이 한다.
오른손에 힘을 주어 일어나며 양 무릎을 동시에 포단에서 뗀 다음 오른손을 왼손과 합쳐 합장하면 1배(拜)가 된다. 절은 적으면 3배, 많으면 3배수(倍數)로 6배·9배·12배 등을 한다.
절이 끝나도 문신(問訊)이라는 한 절차가 남는다. 문신이란 일반에서 행하는 읍과 같은 것으로, 일반에서 읍하고 안부를 묻듯 합장하고 안부를 묻는 것과 같은 마음을 표하는 것이다.
절이 끝나면 양손은 아직 가슴 앞에 합장한 채 무릎 아래 1인치 정도 내리는데 이것을 국궁(鞠躬)이라고 한다. 이어서 오른손을 왼손 안에 겹쳐서 한 주먹을 만들어 위로 올리면서 몸을 일으켜 곧게 세우고, 주먹은 눈썹 위까지 올렸다가 펴서 다시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오른손을 왼손바닥 위에 겹치고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어 미타수인(彌陀手印)을 만듦으로써 부처에게 절하는 절차를 마치게 된다.
불가의 절 가운데 최상을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한다. 오체란 양 무릎·양손 그리고 머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이 모두 둥글기 때문에 오륜(五輪)이라고도 한다. 먼저 똑바로 서서 합장을 하고 오른팔 소매를 걷는다.
양 무릎을 꿇고 양팔을 구부려 팔꿈치를 땅에 대어 부처의 발을 받든 다음 머리를 발에 댄다. 이것을 정례(頂禮)라고 하는데, 소중한 머리를 상대방의 비천한 발에 예를 표하는 것이니 예의 극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차가 끝나면 머리·팔꿈치·무릎의 순으로 펴서 일어난다.
현재 우리 나라의 불가에서 행해지는 절은 크게 합장과 배불(拜佛)로 나눌 수 있다. 합장은 승려끼리, 신도끼리 또는 승려와 신도 사이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절인데, 선 채로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아 세우고 허리를 굽힌다. 이때 허리를 굽히는 정도에 따라 존경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배불에 있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절을 하기 전의 단계에서부터 나타나는데, 합장의 절차가 약화되어 있다. 그 대신 두 팔을 크고 넓게 위로 벌려서 가슴 앞에서 모았다가 땅을 짚고 무릎을 꿇는 형식이다.
이 때 사람에 따라 먼저 오른손을 땅에 짚은 다음 무릎을 꿇으면서 왼손을 옆에 짚거나, 혹은 처음부터 두 손을 함께 모아 땅을 짚기도 한다. 그리고 머리를 손에 댈 때에도 손등을 그대로 대기도 하고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머리를 손바닥에 대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절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절은 크게 선 절과 앉은절로 나누어진다. 선 절은 서 있는 자세에서 하는 절이다. 그 형태는 똑바로 선 자세에서 조용히 고개나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그 굽히는 정도로 존경의 깊이를 표시한다.
이 때 양손은 사람에 따라 다리의 양옆에 자연스럽게 드리우거나 앞으로 모으기도 하나 양손을 모으는 것을 더 정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여성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는 경우가 많다.
앉은절은 앉은 자세로 하는 절로서, 대개 정중한 의식에서 행하는 큰절, 평상시 웃어른을 뵐 때 하는 평절, 그리고 약식절이라고 할 수 있는 반절이 있다.
① 큰절은 평절에 비해 읍의 형식이 분명하고 절의 횟수도 평절의 배가 되는 경우가 있다. 여자의 큰절은 혼자서 하기가 힘들고 실수할 염려도 있어 양옆에서 겨드랑이를 부축해주기도 한다.
남자의 큰절은 몸을 똑바로 세워 발뒤꿈치를 모으고 오른손 엄지를 왼손으로 감싸듯해 눈높이까지 가볍게 올렸다가 천천히 내려 바닥을 짚는다. 이어서 먼저 오른다리를 약간 뒤로 빼어 꿇은 다음 왼다리를 무릎이 가지런하게 꿇고 허리를 굽혀 코가 바닥에 닿을 만큼 엎드린다.
이 때 등·허리·엉덩이가 거의 수직이 되도록 한다. 한 호흡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양손과 왼무릎을 떼어 일어나면서 손을 다시 눈높이까지 올렸다가 같은 방법으로 절을 반복한 뒤 일어나서 양손을 눈높이까지 올렸다가 가슴 앞까지 내림으로써 마친다.
이때 지역에 따라 길사(吉事)와 흉사의 차이를 두어 손의 처리를 달리하기도 한다. 길사란 관례·혼례와 상례에서 대상 다음의 길제(吉祭) 이후의 절차나 제례의 경우를 말하며, 흉사란 상례에서 대상까지의 절차를 이른다. 길사에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흉사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각각 감싼다.
여자의 큰절은 시부모나 친정부모에게, 또는 혼례·상례·제례 등의 의식에서 행한다. 대개는 재배를 하나 혼례 때 시부모를 처음 뵐 때, 사당참배나 제사 때에는 반드시 4배를 한다. 절의 형식은 바른 자세로 서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가볍게 얹고 양팔을 손과 수평이 되게 팔꿈치를 들어 손을 이마에 대고 머리를 약간 숙인다.
이 때 수모(手母)라 하여 두 사람 또는 한 사람이 겨드랑이 밑을 부축해주는 일이 많다. 손과 팔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 천천히 앉아서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고 머리와 허리를 최대한으로 굽혀 바닥에 숙인다.
이러한 자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앉은 자세를 약간 바꾸기도 한다. 앉을 때 왼다리를 조금 뒤로 빼고 앉아 정좌한 자세가 되도록 하고 머리와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② 남자의 평절은 살아 있는 어른을 뵐 때나 조상(弔喪)할 때 행하는 절로서 대개 단배(單拜)를 한다. 절을 하는 방법은 양손을 모아 약간 위로 올리는 듯하고는 큰절과 같은 방법으로 한 다음 일어났다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여자의 평절은 이마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앉아서 하는데, 앉는 자세는 대체로 세 종류가 있다. 양 무릎을 세우고 하는 자세, 양 무릎을 꿇고 하는 자세, 그리고 한 무릎은 세우고 다른 무릎은 꿇고 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양 무릎을 세우고 하는 자세는 똑바로 서서 양손을 자연스럽게 몸의 양옆으로 드리우고 몸을 천천히 곧게 내려서 쪼그린 모양이 되게 한다. 이 때 엉덩이는 바닥에 닿지 않게 하고 양손은 양옆의 바닥을 짚는다. 양 무릎을 꿇고 하는 자세는 오른무릎을 약간 앞으로, 왼무릎을 약간 뒤로 하여 비껴 앉는다.
이 때 엉덩이는 왼발 위에 놓이고 손은 앞으로 모아 바닥을 짚는다. 한 무릎만 세우는 자세는 왼다리는 무릎을 구부려 세우고 오른다리는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이 때 엉덩이는 왼발 위에 살짝 닿게 하고 손은 양옆을 짚는다.
③ 반절은 평교 사이 또는 손아랫사람에게 답례로 하는 절이다. 경우에 따라 무릎을 꿇기도 하고 앉은 채로 하기도 하며, 손도 양손을 모아 짚기도 하고 따로 떼어서 짚기도 한다. 가장 가벼운 평절은 앉은 채로 상체나 고개를 약간 숙이는 정도에 그치기도 한다.
여자의 반절은 남자의 경우와 비슷한데, 아랫사람에게 답례할 때에는 왼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손은 상대에 따라 양옆을 살짝 짚거나 앞으로 모아 짚고 머리와 허리를 약간 숙인다.
이상과 같은 전통적인 절의 예절이 근래에 와서는 많이 해이해졌다. 더러는 일본식 절 비슷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서양풍속을 따라 웬만한 경우면 악수로 절을 대신하는가 하면, 목례라 하여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에 그치기도 한다.
또, 군대에서는 거수경례가 보편화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서로 몸을 끌어안고 볼을 부비거나 어깨를 토닥이면서 다정한 감정을 나타내는 인사를 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절에 관한 속담으로 널리 쓰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절하고 뺨맞는 일 없다.’와 ‘엎드려서 절 받기’가 그것이다. 전자는 예를 다하면 당하게 될 봉변도 면한다는 뜻으로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와 상통하는 것이고, 후자는 상대방이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절할 뜻이 없어 보일 때 이쪽에서 암시를 주어 절을 하게 하는 경우로서, 절을 받아야 할 자리에 받지 못하면 체통이 서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을 ‘옆 찔러 절받기’라 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가례집람(家禮輯覽)』
『오선생례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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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류선(星湖僿說類選)』
『동자례(童子禮)』
『사교예의전서』(학원사, 1960)
「예(禮)」(『예의 기본·사회생활』, 예서원, 1984)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예(禮)편―』(문화재관리국, 1987)
「한국의례에 따른 배례형태고찰(拜禮形態考察)」(남명희, 『안동문화』 1, 1980)
「한국의례에 따른 배례고찰(拜禮考察)」(남명희, 『안동문화』 2, 1981)
「한국가례에 따른 배례의식고찰(拜禮儀式考察)」(남명희, 『안동문화』 3, 198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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