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기
긴 널빤지의 한가운데에 짚단이나 가마니로 밑을 괴고 양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마주보고 번갈아 뛰면서 즐기는 여자들의 놀이.
‘초판희(超板戱)·판무(板舞)·도판희(跳板戱)’라고도 한다. 주로 설에 많이 즐기는 놀이이며, 단오나 추석에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일본의 오키나와현(沖繩縣)유구(琉球)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정초에 젊은 여자들이 하는 가장 대표적이고 발랄한 놀이로서, 설빔으로 곱게 단장을 한 여자들이 널을 뛸 때마다 휘날리는 치마자락과 옷고름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경도잡지 京都雜志≫ 세시(歲時) 원일조(元日條)에 의하면 “항간에서 부녀들이 흰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걸쳐 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뛰는데 그 높이가 몇자씩이나 올라간다.”,“그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이것을 초판희라고 한다.”라고 하여 설날 풍속의 하나로 널뛰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주황(周煌)의 ≪유구국기략 琉球國記略≫의 “그곳 부녀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板舞)라 한다.”라는 기록을 인용하여, 이 ‘판무’를 우리나라의 널뛰기와 비슷한 것으로 보고, 조선 초기에 입조(入朝)한 유구인이 우리의 것을 본받아 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崔南善)도 ≪조선상식문답 朝鮮常識問答≫에서 서보광(徐葆光)의 유구여행기인 ≪중산전신록 中山傳信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정초에 여자들이 하는 유희로 격구(擊毬)와 판무희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조선과 유구 사이에 이러한 비슷한 습속이 있게 된 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중종 때까지 유구의 사신과 상인의 내왕이 잦았으며, 한편으로는 망명객이나 표류민이 우리나라에서 여러 해 머물다 간 사실들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양국의 교류에 의해서 우리나라의 널뛰기 풍속이 유구에 전파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 역사에 대해서는 놀이의 활발함과 좋아서 뛰는 성격으로 보아 유교적인 유한정정(幽閑靜貞 : 부녀의 덕과 행실이 높음.)을 강요하던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마격구를 자유로이 하던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고유민속으로 보고 있다.
널뛰기의 유래에는 몇 가지 속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부녀자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때에 담장 밖의 세상풍경과 거리의 남자를 몰래 보기 위해서 널을 뛰었다는 것과, 옥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하여 부인들이 일을 꾀하여 널을 뛰면서 담장너머로 옥 속에 있는 남편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엿보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밖에 처녀시절에 널을 뛰지 않으면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거나, 정초에 널뛰기를 하면 일년내내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는 속신(俗信)도 있다.
놀이에 사용되는 널의 크기는 대체로 길이 2∼2.4m, 너비 30㎝, 두께 5㎝ 가량으로, 중앙에 짚단이나 가마니 같은 것으로 괸다. 지방에 따라서 널 양쪽 끝부분의 땅을 파기도 한다.
그리고 널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널 가운데 사람이 앉기도 한다. 뛰는 방법은 먼저 두 사람이 양쪽에 한 사람씩 올라선 뒤에 널이 평형을 이루도록 조절한다. 그것은 널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상대방이 불리하거나 널을 구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몸무게가 비슷한 사람끼리 뛰게 되면 널을 같은 길이로 차지하게 되지만, 몸무게가 차이가 날 때에는 몸무게가 적은 사람에게 널을 많이 주어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이것을 ‘밥을 준다’고 한다.
널의 평형이 이루어진 뒤에 비로소 널을 뛰게 되는데, 한사람이 뛰어올랐다가 내리디디면 그 힘의 반동으로 상대방이 뛰게 되며, 이러한 동작을 서로 번갈아 반복하면서 놀이를 계속한다.
놀이의 승부는 한쪽이 힘껏 굴러서 상대편의 발이 널빤지에서 떨어지게 되면 떨어진 쪽이 지게 되고 다음 사람이 하게 된다. 이 놀이는 개인간의 승부도 가릴 수 있지만 여러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할 수도 있다.
놀이 자체가 힘주어 뛰는 것인 만큼 다리에 힘이 있어야 하며 널을 오르내릴 때마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계속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교체가 잦고 분위기가 활기에 넘친다.
한편, 널뛰기를 할 때 부르거나, 널뛰는 모습을 표현한 민요가 여러 지방에 전하고 있다. <널뛰기 노래>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함흥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는 널뛰는 모습이 보다 잘 묘사되어 있다.
(생략)
허누자 척실루 뉘당기 팔 랑 내치마 랑 럭 허누자 척실루 늬눈이 휘 휘 내발이 알 알
이 노래에는 두 사람이 널빤지 위에 마주 서서 어느 한쪽이 먼저 철썩하고 널을 굴러 뛰는 모양과 그때 댕기와 치마의 팔랑거림, 그리고 높게 뛰어 눈이 아찔하고 발이 얼얼한 모습 등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안동지방의 <널뛰기 노래>는, “(생략)/규중생장 우리몸은/설놀음이 널뛰기라/널뛰기를 마친 후에/떡국놀이 가자세라/(후렴) 널뛰자 널뛰자/새해맞이 널뛰자/”라고 하여 널뛰기가 규중처녀들의 즐거운 설날놀이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민요 외에도 조선 순조 때 이낙하(李洛下)의 <답판사 踏板詞>, 유만공(柳晩恭)의 <세시풍요 歲時風謠> 등과 같이 설빔차림의 여자들이 담 넘어 높이까지 서로 뛰고 구르는 것을 노래한 시들도 있다.
널뛰기는 그네뛰기와 함께 여성의 대표적인 놀이이며, 활달한 기상을 길러준 놀이로서뿐만 아니라 신체단련에 도움을 주는 운동으로서 체육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여성들이 신년을 맞아 널뛰는 모습은 생명력을 약동시키는 상징이며, 정초풍경이 빚어내는 우리나라 특유의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놀이이다.
김준근, 〈널뛰는 모양〉, 《기산풍속도첩》, 19세기 말, 무명에 채색, 28.5×35.0㎝,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정초나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 큰 명절에 부녀자들이 즐기던 놀이인 널뛰기 모습을 그린 풍속도이다. 두툼하고 긴 널빤지 가운데에 짚단이나 가마니 같은 것을 뭉쳐 고이고 양쪽 끝단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뛰었다 내려오는 놀이이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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