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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누리/우리문화 곶간

잊고 지내지는 않았나 생각되는 지신밟기의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며

by 지암(듬북이) 2016. 2. 17.





잊고 지내지는 않았나 생각되는 지신밟기의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며

 

- 남산놀이마당

 

 

1.글을 쓰며 드는 단상

막상 굿연구소의 원고 청탁을 받고 보니 무어라, 어떻다라고 글을 정리하기엔 어줍잖은 글솜씨가 부끄럽고 어떠한 내용으로 풀어 갈 것인가를 고민하기엔 생각이 짧다라는 것이 더욱 정리를 하는데 큰 부담으로 자리한다. '지신밟기'에 대한 내용을 문헌에 의하여 정리를 시도할까, 어떤 형태나 형식을 나열하는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이 옳을까 하는 고민에 스스로의 답답함을 가졌으나 짧은 소견들 속에 정리되기는 하였으나 우리 단체에서 '왜, 지신밟기를 하지 않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정리하는 것으로 원고의 내용을 대신할까 한다. 글을 부탁한 굿연구소의 의중과 맞는지 아니면 선배들의 의견과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 안한 것은 아니나 나름의 내용을 통하여 타 단체나, 선배님들 그리고 후진들의 검토와 토론에 이 짧은 생각이 끼여들어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염려도 되나 이러한 토론들이 따른다면 이후 서로의 식견을 넓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2.지신밟기의 의미를 되짚어 보며

80년대초 사회문화패의 활동이 시작된 이후 민족문화의 보급, 대중들 속에 함께 하는 풍물로 자리잡기 위하여, 어색하고 어쑥한 모습으로 북을 안고 장구를 메고 거리에서, 강습 장소에서 활동을 하여 온지 어느덧 10여년의 세월, 풍물은 그 나름대로의 성과를 안고 민족문화 예술에 있어서 가장 많은 동호인과 전문가 집단을 만들면서 그 확고한 문화운동의 한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 동안 배고픔과 단체 운명을 위하여 강습 및 공연을 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은 계속적인 배고픔을 요구하였기에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짭짤한 지신밟기를 행하여 왔다. 이 속에서 이제는 그 의미마저도 상실하는 데에 이르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 정도다. 이 동네 저 장터를 돌며 풍물이 민중에게 안겨 주는 의미만을 위안으로 삼는 우매함이 '민중의 희망과 민중의 분노를 민중이라는 공동체의 의미로 달래고 풀고 한다' 라는 깊은 공동체의식을 상실시키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는가의 고민에 잠을 못 이루던 때가 있어 더욱 지신밟기의 본래의 의미를 찾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지신밟기란 본시 공동의 고민과 문제를 공동의 힘과 공동의 지혜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의미를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던 행위의 수단이었다 생각한다.

이러하기에 전문단체에서 그들의 공동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그저 생계의 의미를 쫓고 수입에 대한 욕심이 앞서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한 지신밟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민족운동의 잘못이며 본연의 의지와 의의를 상실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3.남산놀이마당이 지신밟기를 하지 않게 된 사연

위와 같은 고민이 처음부터 제기되고 고민이 쌓여 결론으로 돌출 되었던 것은 아니다. 남산놀이마당이 이러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돌출 시키기에는 또 많은 사연과 오랜 토론이 따른 후에야 지신밟기의 본래의 의의를 올바로 세울 것을 단체의 원칙으로 도출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 옳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만큼의 이론적인 수업이 따르지는 않았기에 선배들과 후진들의 이후 많은 조언과 내용적 보충이 따라 주길 바란다.

 

93년 정월로 기억된다.

92년 9월 처음으로 문을 열고 위치한 곳은 부산의 외곽인 남산동의 지하실, 습지고 여름이면 후더운 열기가 전해지고 겨울이면 땅밑 어디에 숨어 있었던가 싶은 한기가 서로를 더욱 밀착시키며 겨울 나기를 하며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그 동안 들러 보지 못하였던 단체운영의 자금문제와 처음 놀이마당을 열며 여기저기서 빌렸던 도움의 힘을 또 다시 빌리려 하니 면목도 서질 않았다. 우리를 더욱 어쑥하게 만드는 것은 배고픔과 풍물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라는 부담감이었다.

93년 정월을 기다리며 이러한 어쑥함을 함께 들 수 있는 방안으로 우리는 지신밟기를 하기로 결정하고 93년 정월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려운 형편에도 새옷과 그 동안 미비하였던 풍물과 소리를 보강하고 그 동안 터를 닦아 놓은 전문패의 영역과 겹치지 않도록 하여 계획도 잡고 설 휴가도 반납하는 가운데 드디어 정월을 맞았다.

첫날 행선지인 해운대 시장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후배들의 부푼 마음을 웃음과 동시에 푸는 미소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장 어귀에 버스가 정차하자 우리는 들려 오는 풍물 소리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노익장이 잔득 곁들어진 풍물을 보고는 잔뜩 주눅이 들고 말았다. 복장은 어쑥하고 장단은 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흥겨움과 모여선 패들의 모습과 어우러지는 모습들이란 그 어떠한 전문패의 모습보다 당당하였고 어색함을 넘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 하였다. 일행은 누구도 그 자리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못하였고 종점에서야 겨우 자리를 틀고 내려 돌아오는 버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차 오르는 허탈감에 술잔을 기울이는 그 누구도 말을 잇지 못하였다. 밤새 술에 절인 모습으로 이튿날의 행선지로 잡힌 남산동의 동네 어귀에 서서 북이며 장구를 메고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들은 서로의 귀를 의심함과 동시에 어디에선가 들려 오는 제대로 썪여나지 않는 장단과 운동복 차림에 구겨진 꽃깔을 쓴 동네 청년들의 모여선 사람을 타고 넘는 웃음과 사랑, 희망이 녹아 나는 진정한 어울림의 의미를 통하여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숙제가 우리들 서로의 가슴속에 맺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차디찬 지하실에서는 술병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허탈함 위에 쌓여만 갔다.

이대로는 생활과 운영 자체를 할 수 없다라는 고통스러운 부담감에 몇 일을 술로 보내었고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 속에 장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설 연휴를 보내고 장이 열리는 날 우리는 여느때 보다 더 일찍 준비하고 장터에서 장이 서길 기다리며 후배들의 연습과 동시에 우리 자신들에게 흥겨움과 힘을 주기 위하여 철길을 들어서면서부터 동네 어귀를 흔들 만한 풍물소리를 울리며 동네를 찾았다. 동네에 들어선 우리를 반기는 것은 어린 코흘리개들과 노동력을 상실한 듯한 노인네들의 어리둥절한 눈길과 코흥을 즐기며 어깨춤을 흔들어 대는 모습들이었다. 말 그대로 달동네인 이 동네에서는 설 연휴가 끝나기가 무섭게 젊은 세대들은 노동력을 담보로 하루를 연명할 것을 찾아 모두 나간 후라 더욱 썰렁함 마저 일었다. 그러나 우리는 풍물소리만이라도 제대로 전해 주고 오자는 욕심에 천원의 흥정을 부쳐 가며 청해 줄 것을 대포수가 전하였으나 묵묵히 우리의 장단만을 흥에 겨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차례로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풍물을 더욱 신나게 치며 막상 집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 섰을 때 우리는 그들이 청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쇠잡이 하나 겨우 들어 설 수 있는 크기의 마당에 우리를 청하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이 보였다는 그 느낌을 받고 있을 때, 옛 풍물판을 알고 있는 할머니가 초를 켜고 물사발을 올려놓고 천원짜리 한 장과 동전 몇 닢을 올려놓았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앞서 그들의 애환을 달래고 그들과 제대로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서 지신밟기를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움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그날 온종일 지치고 힘든 줄 모르고 돈 한푼 받지 않고 그들과 한 덩이가 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날 우리가 받고 안았던 것은 항상 그들에게 풍물을 선사한다라는 어리석음을 벗고 우리가 받은 그 큰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애환, 그들의 희망과 그들의 소중한 마음 나누기 속에 우리는 며칠을 토론과 서로의 느낌을 공유하며 이후 지신밟기를 한답네 하고 그들 앞에 제대로 된 공동체 의식 없이 서지 않으리라 결론을 가져 올 수 있었던 것이다.

 

4. 지신밟기의 모범적 모색

남산동은 이전부터 이러한 지신밟기를 통하여 생겨난 이윤으로 해마다 여름밤이면 남산동 전역에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희뿌연 연기를 뿜어 대는 방역 작업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불우한 이웃에서 사랑을 나누는 마음을 만들어 갔으며 경로당을 찾아 위한 잔치를 마련하는 마음이 풍요롭고 평온함이 가슴으로 나누어지고 더하여지는 지신밟기를 해 왔다.. 이러한 청년들의 순수한 마음들을 배우고 우리들 역시도 그들과 어울려 마을을 온종일 돌며 소리도 하고 풍물놀이도 하며 뿌듯한 마음을 가지는 지신밟기를 지금도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언제였다 하기에는 기억할 수 없으나 통영군의 '저도'라는 섬에는 교육시설이라고는 분교식의 서당이 전부였다. 어느 해인가 이 서당으로 파견 온 선생님은 동네 청년들을 모으고 명절이면 배를 타고 인근 섬과 통영군의 마을을 돌며 모여진 돈으로 배를 고칠 수 있는 시설과 서당 운영을 위한 경비와 마을에서 제대로 생활을 잇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나누어주었다 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지니는 의미는 동네라는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돌출구를 지신밟기로 풀었으며 지신밟기를 통하여 모여진 돈은 그 공동체에게 소중한 사랑과 희망을 나누어주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의미를 올바로 찾아가는 아름다움이 담아진다 할 것이다.

 

5.정리하며

아마도 글이 서로 조화를 맞추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통하여 지신밟기의 의의를 다시금 되살리며 공동체의 일원에 의하여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전문패가 하여야 하는 고민이지 전문패의 수입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지신밟기를 행한다면 이러한 의미의 글을 정리하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듯하다.

 

끝으로 3년여의 지역활동을 통하여 지역주민들 속에서 익혀지고 단련되는 풍물소리를 만들고자 하는 가운데 지신밟기의 의의를 얻은 지혜를 풍물을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이 결코 옳다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적어도 그 의의와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감히 글로 정리하는 누를 범한다.

앞으로 많은 선·후배님들의 연구와 토론으로 올바른 의의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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