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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누리 /헛간·바라보기

촛불의 시 - 도종환

by 지암(듬북이) 2017. 2. 9.




촛불의 시 - 도종환

 

아름다운 이여, 아직 촛불을 끄지 마세요

먼저 나온 남쪽 하늘 노란 별들이 눈을 깜빡이며

지상에 켜진 촛불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타들어가는 심지에 남아 있는 불꽃을

제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그대도 나도 이 작은 촛불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시나무 같이 여리고

특별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여,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이 켜 놓은 촛불입니다

우리도 타오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나누어 준 촛불을 옆에 앉은 이에게

불붙여 주며 촛불의 따뜻한 입맞춤에

나는 잠시 황홀합니다

촛불처럼 나도 잠시 출렁거립니다

긴 강물이 되어 흐르는 촛불

이 모순된 형용의 말에 나는 뜨거워집니다

우리는 모순 속에서

모순과 혼돈을 넘어서는 길을

촛불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여,

그대의 차가운 손안에 들어 있는 흰 촛불은

한 편의 뜨거운 시입니다

타오르는 동안

내 안의 간절함도 그 안에 수렴되고

타오르는 동안

내가 내 안을 사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들은

수 만 권의 시편이거나 시경이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 한 편 한 편을 다 들여다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열망의 페이지를 넘기며 상기되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이렇게 역사를 새로 쓰는

촛불 경전이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이여

나는 겨울 라일락나무 같은 그대와 함께

환멸의 세상을 환하게 불태우고 있는 이 시간이

우리 생애의 가장 빛나는 시간임을 압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여,

아직 촛불을 끄지 마세요

별 옆에 함께 나온 초승달이 웃으며

우리의 꼭 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래

우리의 믿음에 귀 기울이고

우리가 가게 될 길 끝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는 별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여, 아직 촛불을 끄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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