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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누리 /문화유산 나들이

영수사

by 지암(듬북이) 2017. 3. 29.





영수사는 918년(태조 1년)에 증통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문헌 기록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절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조선 말기인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 처음으로 기록이 나타나는데 간단히 위치만 소개되어 있다. 1937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영수사는 두타산에 있는데 절 뒤에 영천이 있으므로 절 이름을 영수사라 하였으며 삼한고찰이라 하였다”라고 적혀 있으며, 『상산지(常山誌)』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영수사에서 전해 오는 중수기에 의하면 1624년(인조 2) 벽암대사가 중건하였고, 1831년(순조 30) 승려 묘익이 지방민과 힘을 모아 절을 중수하였다 하며, 1866년(고종 3) 이한이 다시 수축(修築)하였다 한다. 이후 수차례의 중건을 거치면서 근근이 유지되어 오던 조그마한 암자였으나 30여 년 전 혜철화상의 중창에 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수사 경내에는 조선 후기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관음보전과 관음보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그리고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영수사 괘불(靈水寺掛佛)」과 조선 말기에 그려진 「후불탱화」와 「칠성탱화」 등이 남아 있다. 이 밖에 근래에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 그리고 대웅전 앞마당 좌우측에 콘크리트조의 승방 건물과 삼성각이 있다. 영수사는 두타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다.

 

영수사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영수사 괘불」이 보존되어 있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이 모시[저포]에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괘불로서 본래 진천읍 상계리 백련암(白蓮庵)에 있던 것을 암자가 폐허가 되자 영수사로 옮겨와 매년 4월 초파일에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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