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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누리/식물 곳간

배추가 나비의 밥이 된 사연-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by 지암(듬북이) 2019. 4. 16.

배추가 나비의 밥이 된 사연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128-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박물관에 전시된 나비들을 구경하다보면 크기도 손바닥만하고 빛깔도 화려한 종류에 눈길이 머문다. 파란 구조색이 일품인 남미의 몰포나비는 어디에서나 최고 인기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몰포나비의 화려함에는 못 미치지만 호랑나비나 제비나비처럼 나름 ‘외모가’ 뛰어난 나비들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한반도를 대표하는 나비를 하나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배추흰나비를 떠올린다. 배추흰나비의 희고 가냘픈 자태가 백의민족이라는 우리의 정서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생물들이 다 배추흰나비를 보며 감상에 젖지는 않는다. 오히려 배추흰나비라면 치를 떠는 종류도 있다. 바로 이 곤충의 이름을 이루고 있는 배추를 포함한 십자화과(科) 식물들이다. 배추흰나비는 십자화과 식물에 알을 낳는데, 여기서 부화한 애벌레들이 엄청난 식욕으로 잎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유기농 재배라며 구멍이 뻥뻥 뚫린 잎을 달고 있는 배추나 케일은 십중팔구 배추흰나비를 비롯한 흰나비과(科) 나비들의 유충에게 당한 것이다. 반면 호랑나비나 제비나비는 십자화과 식물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배추는 배추흰나비의 밥이 된 걸까.

 

 

독성물질 대신 무해한 물질로 바꿔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 6월 22일 온라인판에는 식물과 나비의 무기경쟁의 역사를 재구성한 논문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현재 배추와 배추흰나비의 싸움에서 나비가 우세한 건 나비의 무기가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이 싸운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식물이 그렇게 무력한 존재는 아니다.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화학물질을 만들어 화학전을 벌이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아무 식물이나 먹었다가는 몸이 배겨나지 못한다.

 

미국 미주리대를 미롯한 국제공동연구팀은 십자화과를 포함한 십화자목(目) 식물들의 게놈을 비교분석해 화학무기개발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그 결과 유전자 중복(gene duplication)이나 게놈 중복 같은 게놈 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때 신무기가 개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전자 중복은 한 게놈에 어떤 유전자가 두 개 이상 존재하는 현상이다. 주로 감수분열 과정에서 재조합이 일어날 때 착오가 생겨 DNA 조각이 한 염색체에 몰리면서 유전자 수가 늘어난다. 게놈 중복은 게놈이 통째로 두 배가 되면서 전체 유전자에 중복이 생긴 것이다.

 

유전자 중복이나 게놈 중복이 일어나면 대체로 다음 단계의 변화가 따른다. 똑같은 유전자가 두 개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즉 덤으로 생긴 유전자는 변이가 생겨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때로는 새로운 기능을 갖게 된다.

 

십자화목 식물은 약 9200만 년 전에 등장했는데 당시는 페닐알라닌을 재료로 해 글루코시놀레이트(glucosinolates)라는 물질을 만들어 해충에 대항했다. 고추냉이나 겨자의 톡쏘는 맛이 바로 글루코시놀레이트 때문으로 십자화목 식물들은 각 종에 따라 다양한 종류와 농도로 글루코시놀레이트를 지니고 있다.

 

십자화목 식물들은 교활하게도 글루코시놀레이트와 이를 분해하는 효소인 미로시나제(myrosinase)를 동시에 만들어 지나고 있다. 단 식물이 온전할 때 세포안에서 서로 분리돼 있다. 그러나 벌레가 식물을 먹어 세포가 파괴되면 미로시나제가 글루코시놀레이트를 포도당과 이소티아시오네이트(isothiocyanate)로 쪼갠다. 이때 나온 이소티아시오네이트가 독성을 지녀 벌레에 타격을 입힌다. 사람이 십자화과 식물을 채소로 먹어도 큰 탈이 안 나는 건 이게 주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 7750만 년 전 십자화목 일부에서 게놈 중복이 일어났고 뒤이어 아미노산 트립토판으로도 글루코시놀레이트를 만들 수 있는 식물들이 나타났다. 즉 글루코시놀레이트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이다.

 

그런데 흰나비아목(亞目)에 속하는 나비 대다수는 트립토판으로 글루코시놀레이트를 만드는 식물들도 먹이로 삼고 있다. 이들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약 6800만 년 전에 새로운 화학무기에 대한 해독제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소 생성과 해독 메커니즘.

십자화과 식물의 세포에는 글루코시놀레이트(1)와 미로시나제가 분리된 상태로 들어있다.

벌레가 식물을 먹어 세포가 파괴되면 글루코시놀레이트는 미로시나제에 의해 포도당과 아글루콘(2)으로 쪼개진 뒤 대부분 독성을 띠는 이소티오시아네이트(3)로 바뀐다.

그러나 배추흰나비 같은 몇몇 곤충은 아글루콘을 무해한 니트릴(4)로 바꾸는 해독 효소를 지니고 있다.

ⓒ 미국립과학원회보

 





 

세월이 흘러 약 3200만 년 전 오늘날 십자화과 식물의 공통조상에서 새로운 글루코시놀레이트를 만드는 방법이 개발됐다. 그 직전 있었던 게놈 중복으로 새로운 기능을 할 수 있는 유전자 자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120여 가지의 글루코시놀레이트를 만들 수 있는 종도 생겼다. 그 결과 흰나비아목의 나비들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오래지 않아 십자화과 식물의 화학무기에 대한 해독제를 갖춘 나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배추흰나비도 이런 적응을 한 종류다. 그렇다면 나비들은 어떻게 해독제를 만들어 대응할 수 있었을까.

 

먼저 해독 메커니즘을 보면 이들 곤충은 글루코시놀레이트가 이소티오시아네이트로 바뀌기 전에 먼저 무해한 니트릴로 바꾼다. 그런데 새로운 구조의 글루코시놀레이트가 나올 경우 이 반응이 일어나지 못해 이소티오시아네이트가 생겨 독성을 된다. 조사결과 배추흰나비 같은 몇몇 나비들이 이런 도전을 극복한 것 역시 유전자 중복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해독 유전자에 몇 차례 중복이 일어나고 이렇게 여분으로 생긴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 새로운 구조의 글루코시놀에이트도 인식하게 됐다는 말이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붉은 여왕은 앨리스의 손을 잡고 계속 달리는데 놀랍게도 주위 풍경이 변화가 없다.

 

“어머나, 우리가 계속 이 나무 아래에 있었던 건가요? 모든 것이 아까와 똑같은 자리예요!”

 

“당연하고말고. 어떨 거라고 생각했지?” (중략)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진화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은 이 에피소드에서 영감을 받아 생물종이 끊임없는 진화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국 뒤쳐져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붉은 여왕 가설’을 내놓았다. 배추와 배추흰나비의 역사도 결국 붉은 여왕 가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배추가 좀 더 속도를 내야할 차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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