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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누리/우리문화 곶간

굴부르는소리

by 지암(듬북이) 2017. 2. 1.



굴부르는소리

풍요기원요의 하나로 굴·조개·미역 등 해산물을 많이 채취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르는 노래.

 

<굴 부르는 소리>는 충남 해안 지역에 전승되는 소리로,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와 서산시 부석면 간월리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현재 간월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에 굴 풍년을 기원하며 ‘굴부르기제’를 행한다.

 

 

굴부르는소리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에서 전승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남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나가 있는 동안 부녀자들은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여 수입을 올린다. 황도리의 부녀자들은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높은 언덕에 올라 “가들말고 가지를 말고 부디말고(부디 가지말고) 돌아와라 부디말고 돌아와라 굴이다.” 하고 노래를 부르며, 해산물을 좀더 넉넉하게 채취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 노래는 북 반주에 맞추어 합창으로 하는데, 그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굴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자신들의 마을에 돌아와 있기를 부탁하는 것인데, 끝에 “굴이다.” 하고 외치는 부분이 재미있다. 이 부분은 “조개다.”, “미역이다.” 하며 대상물을 바꾸어 넣음으로써 소망하는 것들을 다양하게 노래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굴이다.” 하고 외치는 부분은 바라는 바가 이미 이루어진 듯이 표현한 것이다. 바라는 결과를 이미 이룬 듯이 여기면 실제로도 그러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결과의 선점)은 일종의 주술로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굴부르는소리는 대보름을 맞이하여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집단적 심리가 주술적으로 표현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에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가 개최된다. 300여 년에 걸쳐 전승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굴부르기제보존회’가 행사를 주관한다. 정월대보름 만조(滿潮) 시간에 해안가의 어리굴젓 탑 앞에서, 서해 용왕에게 강신-초헌-독축-아헌-종헌 등의 순서로 제사를 올린 뒤, 흰 소복 차림의 마을 아낙네 30여 명이 굴을 담은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바닷가로 나아가 제수인 굴밥을 뿌린다. 이때 아낙네들은 “황해바다 석화야 석화야 이 굴밥 먹으러 물결 타고 모여라”라는 내용의 <굴 부르는 소리>를 함께 부른다.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에서도 부녀자들이 매년 정월대보름에 마을의 높은 언덕에 올라 “가들 말고 가지를 말고 부디 말고 돌아와라 부디 말고 돌아와라 굴이다”라는 <굴 부르는 소리>를 하며, 그해에 해산물을 좀 더 넉넉하게 채취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굴부르기제는 개인적으로 지내기도 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내기도 한다. 굴부르기제는 정월대보름날 밤 만조 때 부녀자들이 포구에 모여 제사상을 차려놓고 비손하던 것이었다. 독경하는 사람이 앉아서 북이나 양판을 두드리며 경을 읽으면 참석자들은 앉아서 빌었다. 굴부르기제는 2~3년 중단되기도 했다. 1983년 간척지 공사를 하기 위해 물막이 공사를 마친 뒤 간월도의 개펄이 엉망이어서 굴을 부르는 비손을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비손할 때 앉아서 경을 읽던 남자 어른이 죽어서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손 형태였던 굴부르기제는 지방문화제의 활성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민속놀이 공연의 형태로 바뀌었다. 1987년 처음 개최된 서산문화제에는 인지면 야당리의 ‘볏가릿대 놀이’가 농민축제의 대표, 안면읍 황도의 ‘붕기풍어제’가 어민축제의 대표로 각각 참가하였다. 그러나 1989년 1월 1일자 행정 개편으로 서산군이 서산시, 태안군과 서산군으로 분리되면서 황도가 태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자 서산군에서는 서산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굴부르기제를 발굴하여 정비하고 각색하였다. 이후 1995년 1월1일 서산군이 시(市)로 통합되면서 서산시와 태안군으로 이분화 되었다.

굴부르기제가 서산문화제에 참가하게 되면서 제의의 명칭은 군왕(群王)이 덧붙여진 ‘굴부르기 군왕제’로 바뀌었다. 황도의 붕기풍어제라는 명칭에서 붕기는 본래 ‘벌떼처럼 일어나라’라는 뜻의 봉기(蜂起)라는 한자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본떠 무리 군(群)자를 붙여 많은 굴이 붙어 오라고 서산군에서 붙였다. 군왕을 용왕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보통 굴부르기제라고 부른다.

간월도 주민들은 매년 가을에 열리는 서산문화제에 참가하여 굴부르기제를 시연(試演) 프로그램의 하나로 공연하고 있다. 문화제에 참가한 이후로는 문화제에 나가서 공연하는 굴부르기제와 똑같은 내용으로 정월대보름날 간월도에서 굴부르기제를 지낸다.

 

간월도리 주민들은 1990년 12월에 건립된 ‘간월도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매년 정월대보름날 낮의 만조 때에 굴부르기제를 지낸다. 1995년 2월 14일 정월대보름날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30분까지 거행된 굴부르기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후 2시 30분쯤 부녀자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어리굴젓 공장 앞에 모여 제를 지내는 기념탑 광장까지 행진한다. 주민들은 현 공장 장소가 과거에도 어리굴젓을 담던 곳이었고, 정월 초이튿날 밤 12시에 당제(산신제)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 어귀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부터 행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굴부르기의 제물도 당제 때 사용한 것을 그대로 쓴다고 한다. 남자의 제의(당제)와 여자의 제의(굴부르기제)를 상징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당제에서는 고기를 제물로 쓰지 않지만 굴부르기제에서는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지낸다.

행렬은 ‘굴부르기 군왕제’라고 쓰인 깃발을 든 두 남자가 앞장을 선다. 그 뒤로 제물을 실은 지게를 진 남자 한 사람과 제물을 머리에 인 부녀자 한 사람, 풍물패인 남자 세 사람이 따른다. 그리고 제관인 부녀자 두 사람을 앞세우고, 부녀자들이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두 손을 사용하여 춤을 추면서 따라온다.

제(祭)는 만조시간인 오후 3시에 맞추어 기념탑 앞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제의는 밤의 만조 때 행해졌으나, 공연행사처럼 지내게 된 굴부르기제는 낮의 만조 때 진행한다. 먼저 제관이 “석화야, 석화야, 석화야”하고 세 번 소리친 후, 축문을 읊는다. 그다음에 다시 “석화야”를 세 번 소리치고 소지(燒紙)를 올린다. 그러는 동안 제사상 앞에서 원을 그리고 앉아 있던 부녀자들은 앉은 채로 빈다.

축문을 읽는 것은 과거의 제의에서나 현재의 굴부르기제에서나 모두 중요하다. “올해에도 정산물, 바디기, 몽대, 굼섬, 드르니, 저드래, 한바위, 수애, 어설, 남댕이, 도툼마루 밖에 있는 석화까지 모두 간월도로 모이게 하여 대풍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축원한다. 간월도 주변에 있는 홍성군과 태안군의 해안가 마을과 섬들을 열거하면서 간월도 쪽으로만 굴이 모이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굴을 부른 다음에는 굴을 딸 때 사용하는 바람막이 거적을 쓴 몇 명의 부녀자들이 제장 가운데에서 굴 따는 작업을 춤동작으로 보이면서 굴 따는 노래를 부른다. 이들이 굴을 까는 작업을 시작하면 원을 그리고 있던 다른 부녀자들도 이고 온 바구니 안에서 굴을 꺼내 까기 시작한다. 부녀자들이 관중에게 생굴을 나누어 주는 동안 본부석에 앉아 있는 유지들이 제사상 앞에 부조금을 놓고 절을 하는 것으로 굴부르기제는 오후 3시 30분쯤 끝난다.

부녀자들의 행진부터 시작하여 1시간여 만에 굴부르기제가 끝나면 부녀자들은 춤을 추면서 논다. 옛날에는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굴부르기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루 동안 지성도 들이고 놀기도 한 행사였다. 굴부르기제가 여성들에게 하나의 놀이공간을 제공해 주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굴부르기제는 이제 관광명물로 자리 잡았다. 방송기자와 사진작가들이 이 행사에 참석하게 되면서 굴부르기제는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민속으로 관광객에게 다가오고, 간월도 주민들에게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을 남자들은 풍물을 치거나 깃발을 들거나 제물을 옮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주로 관객으로서 참여하고 있다. 굴부르기제는 과거 비손 형태로 고사를 지낸 것처럼 부녀자가 중심이다. 제관도 부녀자 두 명이 맡는다. 그러나 굴양식장의 관리나 어리굴젓의 생산을 어촌계가 주도하게 됨에 따라 굴부르기제 행사에 남자인 어촌계장이 관여하게 되었다. 마을 조직으로 되어 있는 굴부르기제 보존회의 회장도 남자인 이장이 맡고 있다. 이에 따라 굴부르기제는 부녀회가 행사를 주도하더라도 부녀회, 어촌계, 굴부르기제 보존회 등 마을 내 3개 단체가 공동으로 협력하여 지내는 셈이다.

 

간월도 주민들은 비손 형태로 한 과거의 고사에 비해 현재의 굴부르기제를 선호하고 있다. 과거의 비손은 용왕님께 비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잘 다듬어졌고, 체계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비손 형태로 고사를 지낼 때에는 부녀자들만 참석해서 빌었지만 지금은 어리굴젓이 간월도의 주 소득원으로 남녀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일부에서는 굴부르기제가 행사용으로 각색되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 타의적인 참여로 행해져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반면 굴부르기제는 간월도에서 나는 굴이 여전히 진짜 간월도 굴이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간척사업으로 굴밭의 면적도 줄어들었고, 자연산인 토굴은 거의 생산되지 않고 양식한 석화굴이 주로 생산되는 상황에서 굴부르기제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있다.

 

지역사례

굴부르기제와 유사한 제의로는 조개를 부르는 제의와 ‘짬고사’가 있다. 조개를 부르는 제의는 안면도의 서남쪽인 충남 태안군 고남면 서쪽 일부에서 조개를 많이 채취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제의로 마을마다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짬고사는 경북 울진군 울진읍 온양2리에서 미역이 많이 생산되게 해 달라고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지내던 제의이다.

고남면 장곡리 3구인 양지뜸 마을의 ‘조개부르는제’는 조개 채취를 담당하는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치러진다. 장산포 해수욕장에서 정월대보름 낮에 물이 나갔다가 들어올 때인 오후 1시쯤 조개를 부른다. 매년 대보름이 되면 부녀회에서는 시장에 나가 돼지머리, 포, 삼색실과, 술을 사고 방앗간에서 떡을 찐다. 밥과 국은 올리지 않는다. 제물은 부녀회원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장만한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쌀이나 보리쌀을 거두어 경비로 썼지만 2001년부터는 마을기금으로 제사를 지낸다.

제물이 준비되면 마을 여자들이 모두 장산포 해수욕장으로 나간다. 진설이 끝나면 여자들은 물가를 따라 서로 손을 잡고 길게 늘어서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남성이 제관과 축을 읽는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주로 할머니가 제사를 주관한다. 제관이 잔을 올려 절하고 축을 읽은 다음 소지를 올린 뒤 물가에 늘어서 있는 부녀자들을 보고 “조개 부르라”고 크게 소리치면 여자들이 큰소리로 “조개야”를 외치고 남자들은 신나게 풍물을 친다. 조개 부르는 소리는 보통 한 번으로 끝난다. 조개부르는제에서 남자들은 떡시루를 지게에 실어 날라 주거나 풍장을 치는 등 보조 역할만 한다.

고남면 고남4리 조개부리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흗날에 ‘조개부르기제’를 지낸다. 남자들이 제관 역할을 하는 고남4리의 조개부르기제는 서산의 굴부르기제와 마찬가지로 외부인사를 초청하고, 관광객도 많이 참여한다.

고남면 고남리 옷점[衣店]마을에서는 섣달 그믐날 자정에 당제를 지내기 이전 썰물 때 갯벌에서 당주 일행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이 조개나 해태[김]를 부르는 ‘홍합제’를 지낸다. 밥 세 그릇, 삼색실과와 술을 차려놓고 제관이 “○○○ 조개요, 조개 오너라.”고 다른 지방의 조개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우∼우∼”하며 조개가 몰려드는 소리를 낸다. 똑같은 방법으로 제관이 해태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은 해태가 몰려드는 소리를 낸다. 이곳에서 말하는 조개는 ‘반지락’(바지락)이지만 홍합제라고 부른다. 당제가 끊어지면서 지금은 홍합제도 지내지 않는다.

짬고사는 예전에 자연산 미역을 채취하던 동해안 지역 마을에서 지냈다. 이곳에서는 미역을 비롯한 해조류의 자생지가 되는 수중의 바위로 이루어진 지역을 ‘짬’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문서에 곽전(藿田)으로 표기된 미역짬은 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자신의 짬에서 미역이 많이 생산되게 해 달라며 할머니들은 짬고사를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지냈다.

울진군 울진읍 온양2리의 짬은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한 구역 당 열 명에서 열다섯 명이 배치되었다. 짬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의논해 정월 열나흗날 밤 11시나 12시에 자기 구역 바위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밥을 올린 다음 “미역이 많이 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짬고사를 지낸다. 술을 붓고 난 뒤 제물은 물에다 던지고 내려온다. 그러나 자연산 미역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지금은 짬고사를 지내지 않는다.

 

 

 

동해에는 청석(색) 굴/ 서해에는 백석 굴/

남해는 적석 굴/ 북해는 흑석 굴/

다른 마을로 가지를 말고/ 우리 마을로 돌아와라/

우리 마을로 돌아와라

 

가들 말고 가지를 말고 부디 말고 돌아와라/

부디 말고 돌아와라 굴이다

 

황해바다 석화야 석화야 이 굴밥 먹으러 물결 타고 모여라/ 황해바다 석화야 이 굴밥 먹으러 간월도 달빛 타고 모두 모여라

 

 

굴부르는소리는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행하는 의례 또한 번잡하지 않다. 부녀자들이 마을의 높은 산에 올라 보름달을 배경으로 소망을 표현하고 한바탕 노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굴부르는소리는 단순한 만큼 어촌에 사는 이들의 소박한 생활상을 느끼게 해주는 노래로 소중한 면이 있다. 특히 이 노래는 말로 결과를 선점하는 주술적 표현을 담고 있어 어촌 부녀자들의 꾸밈없는 순박한 정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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