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교육, 정말 이대로 둘 것인가? -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 문화예술교육축제에 참여한 증평 꿈다락 친구들.
최근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가 발족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문화예술교육지원법에서는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 지역문화예술교육지원협의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등의 설치와 지역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지정을 명시하고 있다. 즉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의 발족은 분명한 법적 근거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는 2015년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문화예술교육전문위원회였다. 그런데 2005년 법 제정 이후 문화예술교육전문위원회가 구성되었거나 활동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현행 개정법은 2015년 5월에 통과되고 같은 해 11월에 발효되었지만 이후 최근까지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움직임은 감지할 수 없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다. 특히 예술강사 파견 사업과 관련하여 2016년 봄 경기문화재단의 반발, 그리고 2016년 말 전국 13개 광역문화재단의 사업 포기 선언, 이후 민간 운영단체 공모 등 지금까지의 전개 상황은 해결보다는 문제의 심화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때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 발족 소식이 들린 것이다.
예술강사 파견 사업은 애초 민간에서 운영하다 2005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설립과 함께 정부로 이관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당연히 민간 전문가들과의 협치가 중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흥원의 소통 부재와 독선적 운영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서는 그것이 극에 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진흥원을 해체하고 다시 원래대로 상향식 의견 수렴이 가능한 분야별 민간 위원회 체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진흥원의 존폐가 거론되는 마당에 느닷없이 그 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그러니 그 주체가 문체부든 진흥원이든 의도에 대해 의심이 들 것은 당연하다. 지금은 당장 파행을 거듭하는 예술강사 파견 사업을 바로잡고 나아가 문화예술교육의 올바른 길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할 때이지, 인선의 과정도 불투명한 새 기구를 발족시키고 있을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이에 있어 혹시나 그간 민간 전문가들과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지적에 대한 면피용으로 급조한 것이나 아닌지 심히 우려되는 대목이다.
사실 지금도 예술강사들은 세종시 문체부 앞에서, 국회에서, 시위를 통해, 토론회와 세미나를 통해, 수많은 문제들을 지적하며 시정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도 애초 문제를 야기한 진흥원이 적극적으로 해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껄끄러운 문제는 계속 지역 핑계를 대거나, 법과 제도상, 또는 형평성에 의거 어쩔 수 없다는 실로 무책임하고 공허한 변명만 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울려나올 뿐이다.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예술강사들에 대해 근로 계약과 보험 혜택 등 노무관리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정부가 나서서 올바르게 했어야 한다. 그러나 몰라서였는지 안이해서였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비상식과 법규 위반이 있었고 당연히 불만과 항의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예술강사 파견 사업은 정부나 진흥원 입장에서 무척이나 까다롭고 귀찮은 사업으로 변질되고 말았고,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이자 근간인 예술강사들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 예술강사 사업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 작년 경기도에서 있었던 파행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된 셈인데, 무엇보다도 개학과 함께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상당 기간 지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여기에 문체부와 진흥원, 문화재단으로 얽힌 워낙 어지러운 결정 구조에 공모로 선정된 민간 운영단체들까지 섞이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더해 이 사업이 “고용정책기본법에 의거 취업취약계층의 우선적 참여를 위한 재정지원 일자리 사업”에 속하도록 함으로써 교육 경력이 많은 강사들을 오히려 배제해야 하는 실로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강력한 항의를 받고 일부 원칙을 수정하여 적용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교육이 뭔지 망각한 이 태도야말로 근본적으로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라 하겠다.
애초 이 사업은 교육과 예술가들의 일자리 창출을 결합한 것이었다. 교육은 경험이 중요하다. 교육자로서의 경험도 중요하고 교육을 실행한 학교의 운영 경험도 중요하다. 따라서 이 사업은 교육자건 학교건 연속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이 사업이 정부로 이관된 후 한정된 예산을 갖고 골고루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잘못된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그것을 지적하는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일부라도 반영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런 협치와 소통의 자세는 사라져버렸다.
2005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강사료는 시간당 4만원으로 묶여 있었다. 민망하게도 2017년 3천원 인상되었다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었다. 연극의 경우 2004년 민간의 연극교육위원회가 연구비 포함 시간당 6만원까지 지급 가능하도록 제도화하고 있었으니 분명 형평성이라는 미명하에 발생한 대표적 퇴보 사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산은 한정되고 쓸 데는 많다는 식으로 이런 상황을 자주 타당화한다. 그러나 과연 예산 확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따져볼 일이다. 취업취약계층 일자리 사업의 개념을 붙이려면 그만한 예산 증액이 있어야 한다. 실례로 2004년에 연극교육위원회가 신청한 연극강사풀사업의 예산은 전년도 8억 원 대비 60% 증액한 12억 8천만 원이었지만, 정부에서 청년실업대책을 요구하면서 실제 책정 예산은 20억 원이 되었다. 당시 대학 연극학과 졸업생들을 많이 받으면서도 현장 연극인들과 협조적 분위기가 가능했던 것은 이렇게 분명한 예산 증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 한 사업에 다른 개념을 덧붙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융성을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전국의 모든 초중고 학생들이 1주 2시간 정도는 문화예술교육 수업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5만 명의 예술교육자가 필요하다. 또 유치원과 어린이집에도 약 5만 명이 필요하다. 더욱이 법에 명시한 대로 일반 국민들이 모두 차별 없이 문화예술교육을 받으려면 500명당 1인으로만 계산해도 10만 명의 예술교육자가 필요하다. 물론 당장 이러한 규모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지향점으로 설정하고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키워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문화예술교육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처음으로 돌아가 근본 철학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법에 명시된 대로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국가의 문화 역량 강화에 이바지”하도록 하려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이에 있어 무엇보다도 “모든 국민은 나이, 성별, 장애, 사회적 신분, 경제적 여건, 신체적 조건, 거주지역 등에 관계없이 자신의 관심과 적성에 따라 평생에 걸쳐 문화예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받는다.”는 조항의 준수를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 2017년 3월 2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한데 누리 > 헛간·바라보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구에게나 봄은 가장 빛나는 날이다 - 김희식 (0) | 2017.04.16 |
---|---|
2017년 3월 10일 - 촛불과 민주주의 승리의 날. (0) | 2017.03.10 |
삼월, 아픔도 시간이 필요하다 - 김희식/시인, 충북문화재단 기획운영팀장 (0) | 2017.03.04 |
충북범도민 13차시국대회 (0) | 2017.02.26 |
세월호 이야기 - ‘416 세월호 그 후’ (0) | 2017.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