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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누리/우리문화 곶간

단오부채(단오선) 이야기

by 지암(듬북이) 2015. 6. 17.

 

 

 

단오부채(단오선) 이야기

 

 

단옷날에 선물로 주고받는 부채. 단오선(端午扇), 절선(節扇)이라고도 한다. 단오선의 종류는 접선(摺扇), 합죽선(合竹扇), 단선(團扇)이 있다.

 

* 접선: 접었다 폈다 하게 되어 있는 부채.

합죽선: 얇게 깎은 겉대를 맞붙여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나 천을 발라서 손에 쥘 수 있도록 만든 부채.

단선: 모양이 둥근 부채.

 

쥘부채(접선)

쥘부채의 종류로는 한국이 세계최초의 부채이다.

대나무를 쪼개어 살을 만들고 종이를 붙여서 접었다 하는 부채로 우리 순수 말로는 '쥘부채' 한자음은 '접선'라고 불리운다. 일반적으로 '합죽선'이란 말로 통용되기도 하는데 엄밀한 의미로 '합죽선'이 아니다.

 

합죽선 : 한국고유의 부채로 권위와 힘의 상징이기도 했던 부채이다.

양쪽가의 굵은 대는 대나무 뿌리로 만들고, 얇게 깎은 겉대를 맞붙여서 살을 만들고 종이 또는 헝겊을 발라서 만든 부채이다. 고리는 은·백통·놋쇠 등으로 만들며 고리가 달린 부분에는 뼈 또는 뿔을 붙인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합죽선은 고급스런 재료를 써서 정교하게 만들었다 하여 가장 귀히 여기는 부채이다.

부채는 본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는 데 쓰지만, 합죽선에는 산수화(山水畵)·사군자(四君子) 등을 그려넣어 미술적 또는 골동품적 가치를 지니는 수도 있다. 특산지는 전주이다.

오죽선(손수화) : 대나무중 '오죽'이라는 대를 사용하여 살을 만들고 종이 및 천을 붙여서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를 말한다.

대나무과 중에 '오죽'이라는 대나무는 그 강도가 강하고 재질이 미려하여 세공용으로 사용하는 대살을 이용한 부채로 "고급 민속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손수화는 대량인쇄기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한지에 직접 그림을 그렇넣은 것으로 부채를 만들었다 하여 '손수화'라고 한다.

 

쥘부채의 역사

'쥘부채'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발하여 사용하던 것을 중국과 일본에 전파하고 다시 유럽으로 발전 계승된 부채이다. '이조실록'에 의하면 한지의 질이 가장 우수한 전주감영에 접는 부채를 전문으로 만드는 선자장(扇子匠)이 작업하는 전자방을 두고 단오절에 임금이 신하에게 부채를 하사하는 부채를 공급하였다 한다.

쥘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 이외에 품위유지나 권위의 상징 그리고 생활속의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어져 왔다.

 

 

여름이 시작되는 단오절에 부채를 생산하는 영호남 지역에서 부채를 진상[端午進扇]하면 임금은 여러 자루의 부채를 시종재신(侍從宰臣)에게 하사[端午賜扇]하며, 부채를 받은 시종재신들은 이를 일가친척과 친지에게 나누어주는 풍습에서 유래한다. 조선 고종 31년 9월 3일(병자일)에 군국기무처에서 단오진선(端午進扇)의 폐지를 제의한 안건이 승인되어 폐지되기까지 단오진선과 단오사선(端午賜扇)은 지속되었다. 그 시원(始源)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한 전거(典據)는 없으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본성(本省)에서 보낸 학령선(鶴翎扇)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고려시대의 관청에서 부채를 내려준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매년 단오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는지에 대한 전거(典據)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 10년 4월 26일(임술일)에 “해마다 각 전(殿)에 바치는 접선(摺扇)에 모두 칠을 하여 국가 경비를 허비하니 진상(進上) 그 밖에는 모두 백질(白質)을 사용하여 절약하자는 사헌부(司憲府)의 상언(上言)이 있어 이를 따랐다.”라는 기록은 단오진선을 의미하지만, 단오사선에 대한 명백한 기록은 세종 때부터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 4월 28일(신묘일)에 중국 사신 백언(白彦)이 우리나라 단오사선 풍습의 유무를 묻고 자국(명나라)에서는 조관(朝官)과 제로(諸路) 사신들에게 단오사선을 하는 풍속을 이야기하며 부채를 간접적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세종이 공조(工曹)에 명하여 단선(團扇) 10자루와 접선 88자루를 만들어 주도록 하였으며, 같은 해 5월 4일(정유일)에는 명나라의 두 사신에게 원선(圓扇) 10자루와 접선 80자루를 나누어 증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인 세종 9년 5월 5일(임진일)에도 중국의 세 사신에게 접선과 원선을 하사하였으며, 그 이후 중국 사신에게 단옷날 부채를 하사하는 풍습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사선(賜扇)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 5월 5일(을묘일)에 “단오절이라 임금이 승정원, 홍문관, 실록청, 교정청의 관원들에게 특별히 주찬과 부채를 내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오진선과 사선의 풍습에 대해서는 『동국세시기』에 “공조에서는 단오선을 만들어 바친다. 그러면 임금은 그것을 각 궁에 속한 하인과 재상, 시종신에게 나누어준다. 그 부채 가운에 가장 큰 것은 흰 화살 같은 대나무살이 40개부터 50개에 이른다. 이것을 백첩이라 하고, 칠한 것을 칠첩이라 한다. 이것을 얻은 사람은 대개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린다. ……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사와 통제사는 절선(節扇)을 올린다. 그리고 또 예에 따라 조정의 신사와 친지 등에 선사한다. 그리고 부채를 만든 수령도 진상하고 선사한다.” 하였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공조와 전라도, 경상도 두 감영과 통제영에서는 단오가 되면 부채를 만들어 진상한다. 그러면 조정에서는 이를 시종관 이상 삼영에까지 모두 예에 따라 차이가 있게 나누어준다. 그러면 부채를 얻은 사람은 다시 그것을 자기의 친척, 친구, 묘지기, 전객(佃客: 소작인)에게 나누어준다. 그러므로 속담에 시골에서 생색내는 것은 여름에는 부채요, 겨울에는 달력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사와 병사는 부채를 조정과 친구들에게 보낸다고 하였다.

공조에서 진상하는 단오진선의 숫자에 대해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에는 대전(大殿)에 오십죽 백반 첩선(五十竹白斑貼扇)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四十竹白斑貼扇)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四十竹白貼扇) 백 자루, 식선(食扇) 두 자루이며, 중궁전에 오십죽 주반사 첩선(五十竹朱斑紗貼扇)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사십 자루, 식선 두 자루이다. 왕대비전에는 오십죽 주반사 첩선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팔십 자루, 식선 두 자루이며, 혜경궁(惠慶宮: 사도세자 빈 홍씨의 궁호, 정조의 어머니)에는 오십죽 주반사 첩선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팔십 자루, 식선(食扇) 두 자루이고, 가순궁(嘉順宮; 유빈 박씨의 궁호. 순조의 사친)에는 오십죽 주반사 첩선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오십 자루, 식선 두 자루로 기록되어 있다.

『만기요람』보다 늦은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 공전(工典) 진상(進上)의 단오진상에 “오십죽 백반 첩선은 각 전궁에 한 자루로 하되 내전에는 주반사 첩선, 순화궁(順和宮: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에는 흑칠사첩선(黑漆紗貼扇)으로 한다. 사십죽 백반 첩선은 각 궁전에 두 자루로 한다. 사십죽 백첩선은 대전에 백 자루, 자전에 각 팔십 자루, 중궁전 사십 자루, 순화궁에 열 자루로 한다. 식선은 각 전에 두 자루, 순화궁에 한 자루로 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공조에서 각 궁에 진상하는 단오선의 숫자는 조선 초기부터 위의 기록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오진선은 조세의 일종으로 진상하지 않거나 조잡할 경우 문책하였으며, 천재지변 같은 재난 시에는 경감하였고 필요에 따라 증가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0년 5월 7일(갑자일)에는 선종(禪宗), 교종(敎宗), 원각사에서는 관례(慣禮)에 따라 매년 단오절에 원선을 바치는데, 지금까지 세 사찰에서 모두 진공하지 않은 사정을 끝까지 추문하여 아뢰라는 전교가 있었다. 또 광해군 9년 5월 5일(무진일)에는 경상 좌병사가 단오절에 봉진한 부채가 너무 거칠어서 외방의 신하로서 위를 받드는 정성이 없고 불경스러움이 심하므로 각별히 추고(推考)하여 뒷사람을 경계시키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 17년 8월 29일(기축일)에는 매년 단옷날이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감영 및 통제영에서 부채를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는 일이 예전부터 전해오는 전례인데, 통제사 이윤경(李潤慶)이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遞職)당하게 되자 흉년이 들었다고 핑계하면서 연례로 하는 일을 폐지하였으므로 이를 문제삼기도 하였다.

광해군 8년 5월 10일(기묘일)에는 비망기로 단오에 진상한 유선(油扇)은 여러 도감에 거의 다 나누어주고 내탕고에 저축된 것이 없는데, 뜻밖에 쓸 곳이 생길지도 모르니 유선 각 삼백 자루를 속히 정밀하게 만들어 올려 보낼 것을 경상도와 전라도의 감사에게 하유(下諭)하라고 일렀다.

한편 인조 18년 1월 12일(갑오일) 및 22년 1월 27일(병진일)에 예조에서 변란(이괄의 난으로 추정) 뒤에 재감(裁減)한 단오부채를 관례에 따라 봉진케 하자는 건의를 윤허하지 않기도 하였다. 현종 11년 12월 3일(병술일) 및 고종 13년, 25년에도 기근과 가뭄 등의 흉년으로 인해 단오에 올리는 부채를 감하도록 하였다.

단오절의 부채는 상부 관청에 대한 중요한 증여품목이 되어 사치해지면서 합죽선(合竹扇)과 같은 재료가 많이 드는 새로운 형태가 양산(量産)되어 대밭을 가진 백성들에게 공출을 강요하고, 죽전(竹田)이 고갈되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권41 11월 27일(신해일)에 정조는 양남(兩南: 경상, 전라)의 암행어사 서유문(徐有聞)을 춘당대에 불러 전남 흥양(興陽: 현 고흥)의 단오진선에 따른 죽전의 피해를 보고하면서 시수(矢數)가 많고 과다하게 큰 부채, 합죽선(合竹扇), 칠선, 뿔을 댄 부채는 일절 금하고 선제(扇制)는 견박(堅朴)하게만 하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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