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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누리/우리문화 곶간

단오 이야기

by 지암(듬북이) 2015. 6. 17.

 

 

 

 

 

 

 

 

정의

음력 5월 5일을 명절로 이르는 말. 단오의 단(端)은 첫 번째를 의미하고, 오(午)는 오(五), 곧 다섯과 뜻이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말한다. 원래 음양철학에서는 기수(奇數)를 양(陽)으로 치고 우수(偶數)를 음(陰)으로 치는데, 기수가 겹쳐 생기(生氣)가 배가(倍加)되는 3월 3일이나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 중에서도 단오는 일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큰 명절로 여겨왔다.

 

단옷날을 수릿날이라고도 하는데 수리란 신(神)이라는 뜻과 ‘높다’는 뜻으로 이것을 합치면 ‘높은 신이 오시는 날[지고(至高)한 신이 하강(下降)하는 날]’이란 뜻이 된다. 단오를 가리켜 중오절(重五節), 천중절(天中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단옷날 산에서 자라는 수리취[戌衣翠]라는 나물을 뜯어 떡을 해먹기도 하고 쑥으로 떡을 해서 먹는데, 그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기 때문에 수릿날이라는 명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수뢰(水瀨)에 밥을 던져 굴원을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으므로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단오는 형초(荊楚)의 풍속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초나라에 굴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평(平)이요, 호는 영균(靈抣)이었다. 그는 충직 고결하고 문장이 또한 절록(節錄)하여 초나라 회왕(懷王)이 특별히 사랑하였으며, 벼슬이 삼려대부(三閭大夫)에 이르렀다. 간신의 무리가 그를 시기 질투하여 왕께 참소하니 왕이 그를 소원하게 대우하였으나, 그는 유명한 ‘이소경(離騷經)’이란 글을 지어 왕이 감동하고 깨닫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회왕이 죽고 양왕(襄王)이 새로 임금이 되자 간신의 무리가 더욱 참소하여 끝내 그를 장사 땅으로 귀양보냈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어부사(漁父詞)’ 등 여러 편의 글을 지어 그 심회를 풀고 5월 5일 멱라수(覓羅水)에 빠져서 자살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해마다 그날이면 죽통에 쌀을 넣어서 물속에 던져 제사를 지내고, 또 그의 혼을 건진다 하여 경쟁적으로 배 건너기를 하였다. 이것이 중국 남방 풍속의 하나인 경도희(競渡戲)가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漢)나라 건무(建武) 연간에 어떤 사람이 대낮에 장사(壯士) 구회(歐回)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는 옛적 삼려대부인데 그대가 나를 위하여 제사지내 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그 제물을 항상 문룡(蚊龍)이 빼앗아 먹어서 얻어먹지를 못하니 만일 제를 지내주려거든 오동나무[棟樹] 잎으로 제물을 싸고 오색 당사실로 매어서 주었으면 좋겠다. 이 두 물건은 모두 문룡이 꺼리는 것이다.” 하고 간 곳이 없으므로 구회가 이상히 여겨 그대로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이 그것을 풍속으로 삼아 단옷날에 주사떡을 만들 때 오색 고명을 넣고 쑥이나 수리취를 넣어서 떡을 만들게 되었다 한다.

 

 

단옷날은 계절적으로 태양축제에 속한다. 7세기 문헌인 『수서(隋書)』에 신라 사람들을 가리켜 일월신(日月神)을 경배하는 민족이라 하였는데, 정월 대보름 축제가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 축제는 태양의 축제라 할 수 있다.

단오는 한국 민족만이 아니라 고래(古來)로 북방민족들도 연중 최대 명절로 삼고, 금(金)나라 때는 이날 배천(拜天), 사류(射柳), 격구(擊毬) 등을 행했다. 신라와 가야시대 이래로 숭상된 단오는 고려시대에는 북방민족의 영향인지 그네, 격구 내지는 석전(石戰) 놀이를 하는 무용적(武勇的) 속절(俗節)로 성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정조(正朝), 동지(冬至)와 아울러 3절일(節日)이 되었으며, 민간에서도 그네와 씨름이 성행하였다.

유만공의 『세시풍요(歲時風謠)』 5월 5일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온다. “단오 옷은 젊은 낭자(娘子)에게 꼭 맞으니(戌衣端稱少娘年), 가는 모시베로 만든 홑치마에 잇빛이 선명하다(細苧單裳茜色鮮). 꽃다운 나무 아래서 그네를 다 파하고(送罷秋天芳樹下), 창포뿌리 비녀가 떨어지니 작은 머리털이 비녀에 두루 있다(菖根簪墮小髮偏). 단오옷을 술의(戌衣)라고 한다(端午衣曰戌衣).” 한국인은 대략 일년에 세 번 신성 의상인 빔(비음)을 입는다. 설빔, 단오빔, 추석빔이 바로 그것이다. 단오빔을 술의(戌衣)라고 해석한 유만공의 할주(割註)에 따르면 술의란 신의(神衣), 곧 태양신을 상징한 신성 의상임을 알 수 있다.

수릿날은 태양의 기(氣)가 극(極)에 달하는 날이다. 단옷날 쑥을 뜯어도 오시(午時)에 뜯어야 약효가 제일 좋다. 다시 말해, 인간이 태양신[日神]을 가장 가까이 접하게 되는 날이 수릿날인 것이다.

 

 

예부터 단오에는 많은 의례가 행해졌다. 궁중에서는 신하들이 단오첩을 궁중에 올리고, 공조와 지방에서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임금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준다. 단오를 맞아 새로 수확한 앵두를 천신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단오절사(端午節祀)를 지낸다. 또한 집안의 평안과 오곡의 풍년, 그리고 자손의 번창을 비는 단오고사(端午告祀)를 지내기도 한다.

내각(內閣), 옥당(玉堂), 한원(翰院)의 여러 신하들이 단오첩을 올리면 대궐 각 전(殿)의 기둥에 붙인다. 또한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올리면 임금은 이날 재상과 시종하는 신하에게 나눠주었다. 호남과 영남 양도(兩道)의 방백과 병영, 수영, 통제영에서 단오 때 부채를 지어 나라에 진상하고 으레 조관과 친한 사람에게 차등 있게 보낸다. 시골에서 생색나는 것은 여름 부채, 겨울 책력이라고 했다.

부채 중에 전주와 나주에서 만든 것을 최상품으로 쳤다. 흰 살로 이루어진 부채를 백첩(白貼)이라 하고, 살에 옻칠한 것을 칠첩(漆貼)이라 하는데, 40~50살의 큰 부채이다. 부채의 종류는 승두선(僧頭扇), 어두선(魚頭扇), 합죽선(合竹扇), 반죽선(斑竹扇), 외각선(外角扇), 내각선(內角扇), 살 넓은 것, 좁은 것, 고리 있는 것, 고리 없는 것이 있고, 그 빛은 자주, 유록, 분홍, 아청, 흰 것 검은 것, 누런 칠, 검은 칠, 구름 빛, 돌비늘 빛이 있었다.

『예기(禮記)』에 보면 중하(中夏)에 함도(含桃)를 제수로 삼아 사당에 천신한다고 하였는데, 함도는 곧 앵두이다. 매양 단오 때 앵두가 익으므로 제철 과일이라 하여 사당에 천신하는 것이다. 또 궁중에서는 근시(近侍)하는 신하에게 앵두를 반사(頒賜)하는 일이 있었다. 서울의 남녀가 앵두 익을 때면 송동과 성북동에 가서 노는데, 이를 앵두회라 한다.

 

단오에는 마을마다 수호신에게 공동체 제의를 지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군현 단위의 큰 단오제가 지역마다 행해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릉단오제이다. 강릉단오제는 대관령 서낭을 제사하며, 본격적인 제의는 음력 5월 1일부터 시작된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영남 군위 옛 풍속에 신라 김유신 장군의 사당이 있는데 속설에 삼장군당(三將軍堂)이라 한다. 해마다 단옷날 고을 아전이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역마를 타고 기를 들고 북을 울리며 신을 맞아서 촌항(村巷)으로 다니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경북 군위군 효령면에 장군당을 복원하여 효령사(孝靈祠)라 하고, 단옷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매년 단오에 문호장(文戶長)을 모신다.

함남 안변에는 상음신사(霜陰神祠)가 있었는데, 그 신은 선위대왕의 부인이라 하며 단옷날 선위대왕도 맞아들여 제사를 지냈다. 또 강원도 삼척의 옛 풍속에는 작은 함에 오금으로 만든 비녀를 담아서 관아 동쪽 나무 밑에 감췄다가 매양 단옷날이면 아전이 꺼내서 제를 지내고 이튿날 도로 감춰 두었다. 속담에 전하기를, 오금잠(烏金簪)은 고려 태조 때의 물건이라 한다. 현재는 이들 제의가 행해지지 않는다.

 

 

단오에는 창포를 넣어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액을 물리치기 위해 궁궁이를 머리에 꽂는다. 궁궁이는 독특한 향기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머리에 꽂으면 액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다. 또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어 거기에 벽사(辟邪)의 색인 연지나 주사를 바르거나 수복(壽福) 글자를 새겨 머리에 꽂거나 패용(佩用)하였다. 특히 비녀에 칠한 연지나 주사의 붉은색은 양색(陽色)으로서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름 동안 더위를 먹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는 데서 단옷날 창포비녀[菖蒲簪]를 꽂는 풍속이 생겼다. 이렇게 창포탕에 머리와 얼굴을 씻고 새 옷을 입고 창포비녀로 치장하는 것을 단오장(端午粧)이라 한다.

단오는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로, 이날 부적을 쓰면 잡귀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집안의 제액도 모두 소멸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단오부(端午符), 천중부적(天中符籍), 치우부적(蚩尤符籍)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내의원에서 옥추단을 지어 금박을 올려서 드리면 오색실에 꿰어 차서 재앙을 물리치고, 근시하는 신하에게 나눠주었다. 5월 5일에 실을 다섯씩 팔에 매는 것은 귀신과 병화를 물리치기 위해서이다. 이름을 장명루(長命縷), 속명루, 벽병증이라 부른다. 옥추단을 차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 풍속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은 신하들에게 애호(艾虎)를 하사하기도 했는데, 쑥이나 짚으로 호랑이 모양을 만들어서 비단조각으로 꽃을 묶어 갈대이삭처럼 나풀거리게 하고, 쑥잎을 붙여 머리에 꽂도록 한 것이다.

단옷날은 쑥을 비롯하여 익모초 같은 약초를 뜯어 말린다. 농가에서는 약쑥을 한 다발 대문 옆에 세워놓아 재액을 물리치려 하였고, 말린 약쑥은 아플 때 뜸을 뜨거나 먹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수리취를 말려서 부싯깃으로 이용했다. 중국 문헌 『하소정(夏小正)』에는 단오에 모든 약을 캐어서 독기를 제거한다 하고,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는 5월 5일에 쑥을 캐서 사람을 만들어 문 위에 달아 재앙을 물리치고 익모초를 말려 약에 쓴다 하였다.

농사의 기풍을 위해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놓아 많은 열매가 열리기를 비는데, 특히 단오 무렵에는 대추가 막 열리기 시작하므로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고도 한다. 그리고 단오에 도장을 만들어 두면 신수가 좋다고 하여 모과나무나 대추나무를 재료로 도장을 만든다.

 

 

단오 명절식으로는 수리취떡과 앵두화채가 있다. 수리취는 모양이 보통의 취나물과 같이 장원형이나, 이면이 백색을 띠고 마른 잎은 불이 잘 붙고 지구력이 있다. 또 생것은 두드려서 쑥떡에 쑥을 넣는 것과 같이 멥쌀가루와 섞어 떡을 만든다. 이 떡을 수리취떡, 쑥떡이라고 한다. 술의라는 말은 우리말에 거(車)라는 뜻인데, 그 떡의 형상이 거륜(車輪)과 같다 하여 떡 이름도 수리(술의)떡이라고 하고 그 떡에 넣는 취도 수리취라 하며, 단오일을 또한 술의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앵두는 여러 과실 중에 가장 먼저 익으며, 단오절이 한창 제철이어서 궁중에 진상하고 종묘와 사당에 천신하며, 편(떡)과 화채를 만들어 먹는다. 앵두편은 앵두를 살짝 쪄서 굵은 체에 걸러 살만 발라서 설탕을 넣고 졸이다가 녹말을 넣어 굳힌 것으로 생률과 함께 담아낸다. 앵두화채는 앵두를 따서 깨끗이 씻고 씨를 빼서 설탕이나 꿀에 재워 두었다가, 먹을 때 오미자 국물에 넣고 실백을 띄워 낸다. 단옷날 민가에서 즐겨 만들어 먹던 청량음료이다.

조선시대에는 단옷날 내의원(內醫院)에서 제호탕(醍醐湯)을 만들어 진상했고, 임금은 이것을 대신들이나 기로소(耆老所)에 하사했다. 제호탕은 더위를 이기고 갈증을 해소하며 보신하기 위해 마시는 전통청량음료이다. 오매육(烏梅肉), 사인(砂仁), 초과(草果), 백단향(白壇香)을 가루로 내어 꿀에 재워 중탕으로 달여서 응고상태로 두었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데, 주로 단오절에 많이 마신다.

그리고 단오에는 창포로 빚은 창포주(菖蒲酒)를 마시기도 하며, 각서(角黍)라고 하는 고기와 나물을 소로 넣고 밀가루로 만든 둥근 떡을 먹는다. 궁궐에서는 쇠고기 대신 민어 같은 흰살 생선의 살을 다져 양념하여 완자를 빚어 넣고 끓인 어알탕을 절식으로 먹기도 했다.

 

 

단오는 봄철의 큰 명절인 만큼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즐겼다. 마을에서는 단오 전에 청년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짚을 추렴하여 그네를 만들었다. 단오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운 옷을 입고 그네를 뛰었다. 장정들은 넓은 마당에서 씨름을 하여 승부를 낸다. 그 법은 두 사람이 마주 꿇어앉아서 각기 오른손으로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당겨 일시에 일어서서 서로 들어 던져 거꾸러지는 자가 지는 것이다. 그 중에 힘이 세고 손이 빨라 거듭 이긴 자를 판매기라 한다. 중국 사람이 이를 고려기(高麗伎)라 하였다. 이와 더불어 맨손으로 승부를 가리는 수박(手搏)을 놀이화한 수박희도 하였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편을 나누어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石戰)을 단오에 벌이기도 했다.

단옷날 강릉에서는 단오제를 지내기도 하고 또 각 지역마다 봉산탈춤, 송파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 같은 탈춤과 가면극들이 장터에서 연희되어 명절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경북 경산시 자인에서는 단오에 한장군(韓將軍)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원무(女圓舞)를 추며 노는 한장군놀이가 전승된다.

 

 

 

 

1. 단오 고사

정의

단옷날에 건강과 풍요와 제액(除厄)을 기원하며 올리는 가정의례.

 

역사

중국의 단오는 초나라 굴원을 제향하는 풍속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한국에서의 단오는 중국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에는 5월 농사를 시작하는 절기에 하늘에 제향한 풍속이 나온다. 가장 양기가 성한 날에 무더위 또한 성하기 때문에 이날 제사를 드림으로써 더위와 함께 찾아올 온갖 잡병을 예방하고 액을 물리침과 더불어 농사의 풍요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를 보면 “단옷날 부적을 만드는데 부적에 쓰기를 ‘오월 오일은 천중절이다. 위로 하늘이 내신 녹을 얻고 아래로 땅이 준 복을 받으며 치우(蚩尤) 신의 동두(銅頭)와 철액(鐵額)과 적구(赤口)와 적설(赤舌)로 404가지 병을 일시에 소멸하니 율령을 내린 듯 서둘러라.’ 정조 을묘년(1795년) 이후로 이것을 불경인 은중게(恩重偈)로 바꾸었는데 나무 삼만다 모다니 엄 아이나 사바하오.”라고 하였다. 『해동죽지(海東竹枝)』 명절풍속 조에도 병을 없애는 단오부적을 소개하고 있으면서 “옛 풍속에 단옷날 정오에 이 부적을 들보 위에 붙이면 한 해의 온갖 병을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학대사의 비법”이라고 하였다.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단오부채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였다. 단옷날에 임금이 신하에게 옥추단(玉椎丹)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하고, 내의원에서는 제호탕(醍醐湯)을 만들어 바치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풍속은 단옷날이 질병 및 이의 예방과 관련 있는 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단옷날에 액을 물리치기 위해 쑥으로 호랑이 모양을 만든 애호(艾虎)를 돌렸다. 여성들은 궁궁이를 머리에 꽂거나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새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단옷날에 가지를 쳐내 대추나무를 시집보내는 풍속, 새로 수확한 앵두를 천신하는 풍속, 새로 수확한 보리를 쪄서 만든 밥을 꿀물에 넣어 만든 보리수단을 천신한 풍속 등은 농사의 풍요를 담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와 같은 방법들은 건강, 풍요, 제액을 소망하기 위한 주술적 방안이지만 단옷날 아침에 제의를 행함으로써 신령에게 소망하는 바를 고하기도 하였다. 단체로 행하는 제의는 단오제란 공동체 제의로 나타나고, 개인별로 행하는 제의는 차례(또는 다례, 차사, 체사 등으로 불림)와 고사로 나타난다. 차례(단오차례)는 조상신에게 제향하는 것고 고사(단오고사)는 일반적인 신령에게 제향하는 것이다.

 

 

내용

단오고사는 집안에서 행하는 안택과 같은 형태가 있고, 산에 가서 하는 산멕이가 있다. 집에서 하는 경우는 경기도지역에서 발견된다. 쑥이나 취나물을 뜯어 떡을 만들어 제향하거나 빈대떡을 부쳐서 제향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강원도 인제와 속초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단오고사가 있었다. 집 밖에서 하는 단오고사는 산멕이 형태로 나타난다. 강원도 강릉, 삼척, 정선, 동해 등 지역의 산간마을에서 많이 행해졌다.

산멕이는 보통 사월쯤에 많이 하지만 집집마다 선호하는 날이 달라 오월 단옷날에 제향하게 되면 단오고사가 된다. 내용상으로는 산을 먹이는 풍속이므로 산멕이라 하지만, 단옷날에 제향하기 때문에 단오고사라고 칭하는 것이다. 부정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이른 새벽에 제향한다. 보통 산을 먹이는 장소가 마을 인근의 산자락이므로 동이 터오기 전에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제향의 주체는 대체로 여성이다. 이른 새벽에 산에 오르기 때문에 혼자서는 무서워서 올라가기 힘들다. 그래서 여럿이 함께 산에 올라간다. 그러나 고사는 제각각 한다. 제향의 장소는 마을 인근의 야산이거나 깊은 산속일 수도 있다. 냇가 근처의 나무나 바위에 자리 잡기도 하지만 냇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차려서 가지고간 제물을 주로 나무 밑에 제향한 뒤 가져간 새끼를 실타래와 함께 나무에 묶어 놓고 내려온다. 집으로 돌아오면 새로 꼬아 놓은 새끼를 부엌에 걸고 간단히 비손한다. 제물은 집집마다 다르다. 정선지역에서는 신체(神體)로 동우(동이)를 사용하기도 한다.

 

 

지역사례

오늘날 단오고사로 조사․보고된 예는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몇몇 보이지만 여타 지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단오고사는 점차 사라져 가는 풍속이다. 강원도에서는 강릉, 삼척, 정선, 인제, 동해, 속초 등 지역에서 발견된다. 경기도는 양주, 양평 등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효개울마을에서는 단옷날에 빈자떡(빈대떡)을 해 놓고 집안의 여러 가정신(성주, 터주, 측신, 조왕 등)을 위한 다음 식구들이 그 음식을 먹는다. 양평군 단월면 덕수2리에서는 단옷날에 쑥처럼 생긴 떡취를 뜯어다가 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고 먹는다.

강원도 속초시 도문동에서는 취나물을 뜯어서 취떡을 빚어 단오고사에 올린다. 인제군 인제읍 귀둔1리에서는 단오 하루 전에 미리 뜯어 놓은 취나물을 삶아 건진 뒤 차좁쌀가루에 섞어 취떡을 빚는다. 이때의 곡식은 지난해 시월상달에 대왕단지 또는 제주단지 안에 넣어둔 것을 꺼낸 것이다. 뒤뜰 장독대 옆에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취떡을 시루에 쪄서 시루째 올려놓고 집안의 안녕과 오곡의 풍년을 축원한다. 축원이 끝나면 갈잎에 취떡을 싸서 먼저 광에 모신 대왕단지 위에 매달아 놓고 이후에 집 주위의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갈잎에 싼 취떡을 끼워 놓았다가 꺼내 먹는다.

정선군 화암면 호촌리 풍촌마을에서는 ‘산동우(산동이)’를 이용한다. 작은 단지만한 크기의 산동우를 대부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집 뒤뜰 처마 아래쪽 바닥에 놓아 둔다. 이 안에는 그해 수확물 가운데 수지로 나온 벼나 차조를 넣어 둔다. 단오가 되면 산동우에 들어 있는 곡물을 찧어서 취떡을 하거나 메를 지어 산치성을 드리러 산으로 간다. 이 마을에서는 산치성과 산멕이를 구별한다. 산치성은 단옷날에 반드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멕이는 이날에 한다. 마을 뒤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다. 삼봉 가운데 맨 오른쪽 봉우리는 마을의 삼척 김씨 집안, 가운데 봉우리는 마을의 강릉 유씨 집안에서 즐겨 갔다. 산멕이는 혼자 가기 어렵기 때문에 몇 명이 함께 간다. 대체로 삼척 김씨 집안에서는 여성이 주로 가지만 강릉 유씨 집안에서는 부부가 갔다. 생용(작은 솥)과 쌀을 갖고 가 현지에서 직접 메를 지어 올리다가 번거로워 나중에는 집에서 지어 갖고 갔다. 이때쯤이면 취나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취떡을 하거나 산동우에 있던 차조로 떡을 하기도 하였다. 진설은 매년 가는 큰 나무 아래에 하였다. 정성을 들인 나무를 무심코 베면 반드시 뒤탈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모두 베어져 그 나무들을 볼 수 없다.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에서도 오월 단옷날에 고사를 지낸다. 산멕이를 하는 방식과 집 뒤뜰에 모셔 놓은 단지에 고사를 지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산멕이를 하는 방식은 풍촌마을과 비슷하다. 집 뒤뜰에는 메밀을 넣은 동이(단지)가 모셔져 있다. 단지 뚜껑을 덮은 다음 중간에 종이를 끼운 왼새끼줄로 테두리를 동여매어 놓았다. 오월 단오가 되면 이 단지 앞에 여러 가지 제물을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낸다. 서낭에 가서 하는 경우도 있다. 집에서처럼 여러 가지 제물을 차려 동네서낭에 가서 고사를 지낸다. 이때 서낭당에 백지 종이를 접어 하나를 걸어 놓고 메 한 그릇과 물 한 그릇을 올리는 식으로 간단히 할 수도 있다.

삼척시 도계읍 점리에서는 마을 인근 솔밭에 있는 산당에서 산멕이를 한다. 단옷날 낮에 혼자 가거나 둘이 간다. 산당 근처에는 소나무가 있다. 먼저 여기에 종이를 매어 놓고 시작한다. 제물은 밥 한 그릇, 떡(절편, 취떡), 포, 적, 만두 등을 장만한다. 육고기, 어물 등 비린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두2리에서는 육고기와 술도 장만하였다. 이처럼 제물장만은 집안마다 다르다. 도계읍 전두2리에서는 일가친척이 함께 대덕산으로 가서 산멕이를 하였다. 이때 제물 장만은 한 집에서 도맡아 하기도 하지만 여러 집이 제각각 하기도 하였다. 큰 소나무에다 실을 한 타래 묶어 놓고 삼베조각을 걸어 놓는다. 이 삼베조각(지금은 옥양목)을 찢으면서 한 갈래마다 윗대 조상부터 한 분씩 빌어주고 난 뒤 나무 위에다 찢어진 삼베조각(옥양목)을 걸어 놓는다. 산멕이는 조상에게 비는 성격이 강하였다. 사람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 키우는 가축들도 빌어준다. 특히 소를 많이 위하였다.

삼척시 원덕면 기곡리 김녕 김씨 집안은 같은 집안끼리 산멕이를 가는 경우가 많다. 산멕이를 갈 때는 한지 한 장과 실 한 타래를 가지고 가서 소나무에 매어 놓고 제향한다. 일가이므로 한 나무에다가 모두 실과 한지를 매어놓는다. 가는 곳은 동산메기이다. 그곳에는 산당과 삼신당이 함께 있다. 실과 한지는 산당에만 맨다. 산당에 올리는 제물은 메 한 그릇, 채소 한 그릇, 술 한 잔, 어물, 돼지고기 등 이다. 떡, 과일, 고기 등은 쓰지 않는다. 삼신당에는 메 한 그릇과 채소 한 접시, 술 한 잔을 부어 놓는다. 단옷날 식전에 메를 지어서 산에 올라가 진설을 마친 다음 절을 하고 축원 한 뒤 제향한 메를 아침 삼아 먹고는 객귀를 먹인다고 하여 제물을 조금씩 뜯어 내 던지고 나서 내려온다. 소지는 올리지 않았다.

강릉시 옥계면 도직리에서는 마을에서 30여 분 거리에 있는 뒷산으로 산멕이를 간다. 부엌에 쳐 놓은 금줄을 걷어내어 산에 가 나무에 쳐놓고 가지고 간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은 마을 인근 바다에서 난 생선, 술, 메, 나물 등으로 간단하게 장만한다. 진설이 끝나면 절을 하면서 축원한다. 이후 제물을 조금씩 작은 그릇에 담아 던지면서 “산신님! 산신님! 많이 잡수시고 그저 가내 무사 바랍니다.”라고 중얼거린다.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무서워 가기 어렵다. 서너 명이 한 조를 이뤄 함께 간다. 그러나 산멕이는 제각각 한다. 제향의 주체는 여성이다. 산멕이를 마치고 집에 오면 곧장 부엌으로 가서 새로 금줄을 쳐 놓는다. 이 금줄은 이듬해 단오고사를 지내기 전까지 부엌에 매달아 둔다. 부엌에 금줄을 새로 치고 난 뒤 간단하게 제물을 차려 놓고 제향한다.

 

 

2. 단오물

정의

단오에 내리는 비[雨]를 이르는 말. 단오물은 단옷날 내리는 비를 말하지만, 단옷날 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기후점(氣候占)의 하나이기도 하다.

 

내용

단오물 풍속은 농경문화가 정착되고 단오 같은 속절(俗節)이 정착한 이후에 생겨난 세시풍속으로 볼 수 있다. 단오물에 대한 인식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충남 부여ㆍ예산ㆍ금산ㆍ천안, 전북 진안에서는 단오에 비가 오면 논농사에 좋다고 여긴다. 부여에서는 “단오물 든다.” 하여 긍정적으로 여기고, 예산에서는 단오에 비가 오지 않으므로 “단오물은 정승하기보다 더 어렵다.” 할 정도로 단오물을 기다린다. 금산과 천안에서는 모내기에 필요한 비로 여긴다. 전북 진안에서는 “단오물 지워서(기다려서) 모심는다.”라고 할 정도이다. 전남에서는 “단오에 비가 오면 시절이 좋다.” 하였다.

반면 경남 마산과 양산에서는 단오에 비가 오면 잡곡농사가 잘되고, 맑으면 논농사가 잘된다고 한다. 또 부산에서는 “단옷날 그넷줄에 물이 흐르면 그해 농사는 흉년이 든다.”라고 하였다.

 

의의

올벼는 단오 무렵에 모내기를 해야 하므로 단옷날 비가 오면 반가워했다. 그러나 단옷날 비올 확률이 낮으므로 단옷날 비를 통해 농사의 풍흉을 점쳐 위안으로 삼았던 지혜가 엿보인다.

 

3. 단오첩

정의

음력 5월 5일 단옷날 신하들이 단오절을 축하하는 시를 지어 궁중에 올린 첩자(帖子).

 

내용

단오절을 축하하는 시를 짓는 풍습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후기까지 내려온 풍속이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고려사(高麗史)』 권12 「세가(世家)」 12, 예종 11년 5월 병신일조에 “병신일에 왕이 단오시를 지어 좌우에 널리 보이고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다(丙申日 王賦端午詩 宣示左右 令和進).”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단오첩자와 연결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단오절을 축하하여 시를 짓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 여원명(呂原明)의 『세시잡기(歲時雜記)』 정월, 원일 연상시(延祥詩) 춘첩자(春帖子)에도 “학사원(學士院)에서 단오 한 달 전에 합문(閤門)에 붙일 첩자를 지어서 기일 내에 대궐로 진상해 들여보낸다.”라고 하여 우리의 단오첩자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승정원(承政院)에서 시종(侍從)과 당하문신(堂下文臣)들을 미리 뽑아 연상시를 지어 바치게 한다. 관각(館閣)의 제학(提學)에게 오언 혹은 칠언의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를 짓기 위한 운자(韻字)를 내게 하여, 등수를 매겨 뽑힌 것들을 대궐 각전(各殿)의 기둥과 상인방(上引枋)에 써서 붙인다. 입춘의 춘첩자와 단오의 단오첩도 모두 이 예를 따른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러한 절차에 따라 단오첩을 짓고 진상된 단오첩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수를 택하여 궁문에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첩자의 내용은 단오절을 축하하는 축시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 23년 5월 2일에 임금이 시 짓는 풍조를 일으키기 위하여 첩자를 만드는 데 있어 상세하게 장려하였는데, 첩자 자체가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분담해서 옛 풍속을 지키는 것에 그치자 성종이 “요즈음 첩자를 보건대, 대부분 마음을 써서 만들어 바친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시를 잘 짓는 재상으로 하여금 그 고하를 매기도록 하여 으뜸에 해당하는 자는 논상(論賞)하도록 하라.”라는 전교를 내렸다는 기사가 있고, 『영조실록(英祖實錄)』 38년 5월 3일에는 진상된 단오첩이 옳지 못한 일을 고치도록 사리(事理)를 말하여 간하는 규간(規諫)의 내용이 없이 찬미나 과찬의 내용으로 되어 있어 이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들로 보아 단오첩의 내용은 단오를 축하하는 내용과 더불어 규간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보이며, 점차 왕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흐르기도 했다.

 

 

4. 단오맞이굿

정의

5월 단오를 맞이하여 집안의 재수를 위해 행하는 무속제의.

 

내용

단오맞이굿은 5월 단오 즈음에 벌어진다. 단오맞이굿은 세시절기인 단오를 배경삼아 치르는 굿이다. 재가집의 요청에 의해 재수굿의 하나로 행해지는 경우와 만신과 단골의 지속적 관계를 맺는 열두 달 치성제의의 하나로 행해지는 경우가 있다. 두 경우 모두 집안의 평안함에 감사하고 무사태평, 무병장수, 부귀공명을 비는 것이 주가 된다.

단오맞이굿은 철따라 행해지는 신(신령)맞이굿의 한 형태로서 일종의 철맞이굿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것은 열두 달 베풀어지는 굿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월의 세배살이와 횡수막이, 2월의 개춘(開春)맞이, 3월의 꽃맞이, 4월의 철쭉맞이, 5월의 단오맞이, 6월의 햇밀천신(薦新)과 유두맞이, 7월의 칠석맞이, 8월의 추석 한가위, 9월의 구일맞이, 10월의 햇곡맞이, 동짓달의 동지맞이, 섣달의 설경(雪景)맞이 등이 그것이다.

 

지역사례

단오맞이굿과 관련해서는 인천 지역과 서울 지역이 간략하게 조사되었다. 인천 지역의 경우 계절에 따라 그 명칭이 정해지는 재수굿의 하나로 단오맞이굿을 꼽고 있다. 서울 지역의 경우 만신과 단골이 지속적 관계를 맺는 열두달 치성제의의 하나로 단오맞이굿이 보고되었다. 이상순 만신의 경우 ‘단요맞이’라 부르는 데, 5월 단오라는 세시풍속과 무속적 제의가 맞물려 진행되는 치성이다. 진퍼리 살군당 애기씨당의 김옥렴 당주의 경우 5월에 하는 치성제의의 하나로 단오맞이가 조사되었다.

 

5. 단오 부적

정의

단오를 맞아 그해의 액을 쫓기 위해서 쓰는 부적. 단오부(端午符), 천중부적(天中符籍), 치우부적(蚩尤符籍)이라고도 한다.

 

내용

단오는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이날 부적을 쓰면 잡귀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집안의 재액도 모두 소멸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단오에는 그해 불길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주부가 절에서 부적을 받아와 집안의 방문 위나 부엌 벽에 붙였다. 또한 단오에 내의원에서 제호탕(醍醐湯)과 옥추단(玉樞丹)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나, 창포의 뿌리로 만든 창포비녀도 단오의 양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주술행위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21년 기록을 보면, 태종이 단오부적을 보고 글귀의 내용이 모두 다른 이유를 물었는데, 이때 답변을 한 사람은 경사(經師)로 있는 승려였다. 하지만 이 승려는 자신의 스승이 전수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은 경사를 없애고 서운관(書雲觀)에서 관장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당시 단오부적의 제작을 천문관측 및 역서와 절기를 담당하던 서운관에서 담당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명칭이 바뀌고 단오부적을 담당하는 기구가 된다. 따라서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까지 부적의 제작 배포를 승려가 전담했지만, 점차 승려를 배제하고 관리가 전담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상감에서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찍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궐 안의 문설주에 붙였다고 한다. 또한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도 이것을 붙인다는 기록으로 보아, 민간에서도 그 풍속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단오 풍속이 한나라 때 “도인(桃印), 곧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장으로 사악한 기운을 멈춘다.”라는 기록과 『포박자(抱朴子)』에 “적령부(赤靈符)를 만든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중국에서부터 단오풍속과 부적 붙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처용의 얼굴을 그린 부적이나 비형랑과 관련한 부적이 사용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이와 유사한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이것과 함께 또 한 장의 부적을 찍는데, 그 내용이 매우 길다. 내용은 12신을 불러 잡귀를 쫓는 것으로 만일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이들의 양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甲作食凶 胇胃食虎 雄伯食魅 騰簡食不祥 攬諸食咎 伯奇食夢 强梁祖明共食磔死 寄生 委隨食觀 錯斷食巨 窮奇騰根共食蟲 凡使十二神 追惡凶 嚇汝軀 拉汝幹節 解汝肌肉 抽汝肺腸 汝不急去 後者爲糧.” 이것은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에서 나례(儺禮)를 행하여 역질을 쫓아낼 때 사용한 글이라고 한다.

 

-자료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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