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생신이 크리스마스 연휴와 겹치게 되었다.
이번 주말에 온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고,
매번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이번에는 조금 넉넉하게 이곳 저곳 둘러보며 가기로 했다.
천안에서 평소에 다니던 삽교천 방향이 아니라 아산- 예산- 서산A지구방조제 도로를 타기로 했다.
아침부터 온 몸이 으실으실.
감기. 몸살이 시작되려나보다.
날도 흐리고...
혼자 부지런떨며 아침상에, 설겆이, 쓰레기 분리수거와 짐 정리에...
다들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에휴!
꽥꽥! 오리가 되어 꽦!꽥!거렸더니 몸살 기운이 한층 약 오르고,
10시 넘어서 출발하게 되었다.
▲ 다음 지도에서 확인한 수덕사.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견성암과 정혜사를 거쳐 덕숭산을 한 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수덕사 (修德寺)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만공스님은 1871년 3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경허스님의 전법제자로 법명은 월면이고 호가 만공이다. 14살이 되던 1884년 동학사에 들른 경허스님의 인도로 충남 서산 천장암에서 태허스님을 은사로, 경허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 스님은 1905년 수덕사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수행하며 수좌들을 맞이했으며, 유점사 금강선원과 마하연 선원 조실을 지내고 1935년 5월 마곡사 주지로 추대됐다. 또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간월암을 중창 또는 복원했으며, 일본불교에 맞서 조선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1946년 10월20일 세수 75세, 법납 62세로 덕숭산 정혜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 경허(鏡虛)를 계사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는 이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던 중 1904년(광무 7년)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그가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찾아오기도 했다.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노래 하나를 불러주었다.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고 나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으니 내가 부른 그 노래가 바로 법문이라 답하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상좌들은 나중에 은유적으로 풍자한 그 뜻을 이해하였다.
덕숭산 수덕사(修德寺),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중창하였으며, 1920년대초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1927년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을 지었는데,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하여 임제종풍(臨濟宗風)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1937년마곡사(麻谷寺) 주지를 지낼 때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조선 31본산(本山)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불교의 일본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만공은 당시 회의석상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에게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말로는 독실한 불자라 하나 조선의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교리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며 오히려 그의 명복을 빌어주자며 조롱하였다.
1940년 5월의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보급과 전파에 전력하였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강조하였다. 덕숭산 상봉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암자를 짓고 생활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계속 전월사에서 생활하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 중얼거린 뒤 잠들듯이 열반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사천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수덕사에 오르는 길.
좌.우로는 여러 음식점들과 상점들이 늘어서있다.
▲ 식당 앞에 피라칸타 열매가 화려하다.
▲ 매표소
▲ 어른은 3천원, 중고생은 2천원, 초등학생은 천원.
무료: 영.유아, 만 65세이상, 국가유공자, 2급이상 장애인(보호자 포함)
이리저리 둘러보다.
▲ 꽃귀버섯
▲ 송악
▲ 담쟁이덩굴 열매 쭈글쭈글.
깜장할마씨의 숨 가쁜 이야기들
▲ 산수유 할마씨 마냥 색시처럼 그렇고싶다.
▲ 모감주할마씨 고이 잠드시고,
▲ 한겨울에도 푸릇한 이끼들.
"청 ~ 노세! 청 노세!" -고성오광대 불림.
▲ 메주의 향 단정하다. ㅎㅎ
▲ 꽃망울을 준비하는 동백.
▲ 꽃댕강나무 댕강댕강!
몸살 기운에 돌아다니는 것도 제법 귀찮고 누워 앓고싶다. ㅜㅜ
내려오는 길에 식당에 들려...
▲ 아마도 주변 식당의 음식가격은 비슷할 것이다.
애들은 불고기덮밥(만원)을, 산채 정식(만 3천원) 2인분을 시켜 깔끔하게 냠냠!
조금 기운이 나네.
▲ 뭔지 궁금해 물어보니 '세발나물'이라고한다.
세발나물- 갯개미자리
▲ 식사 후 나온 둥굴레차.
현금으로 계산하니 주차권(2천원)을 주시네.ㅎㅎ
간월도를 향해...
▲ 해당화 열매
간월암(看月庵)
간월암(看月庵)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암자이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간조시에는 뭍(간월도)과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지형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이 어리굴젓을 태조에게 진상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1530년(중종 25) 찬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월도만 언급되어 있고
간월암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조선 후기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1914년 승려 만공(滿空)이 다시 창건하였다
▲ 물이 들어오고 있다.
예전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변한듯...
큰바위들과 탑 쌓기 좋게 정제해놓은 인공 사각돌맹이들이 조금은 낯설다.
▲ 고랑따개비
▲ 살조개
▲ 꼬시래기로 보여진다.
▲ 복털조개
▲ 담황줄말미잘
▲ 좁쌀무늬고둥 종류
신두리해안사구를 향해...
5시면 문을 닫는다.
에궁!
그냥 해변을 거닐다....
차 한잔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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