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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나들이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두웅습지/이종일선생 생가지

by 지암(듬북이) 2017. 3. 2.




태안 신두리해안사구 (泰安 薪斗里海岸砂丘)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최종병기 활> 장면의 마지막 대사이다.

조선의 신궁 이야기를 담은 영화 활의 촬영지 중의 하나가 신두리 해안사구이다.

 

해안사구는 바람과 함께 한다. 그 바람을 계산하지도 않고 극복하지도 않고, 다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렇게 소복하게 쌓여가고 넉넉하게 안아주면서 모래언덕이 만들어진 것이다.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에 위치한 신두리 해안사구.

고향에 내려갈때마다 매번 스쳐지나가기만했다.

신두리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의 추억으로 조금은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자취생활을 원북고개에서 했고,

다들 어렵게 살았던 시기라 월세 5천원도 당시에는 큰 돈이었는지 모른다.

학교를 파하고오자마자 바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를 구하러 원북고갯길 주변의 야산을 넘나들었고,

힘쎈 동네 아이들 만나 나무도 빼앗기고 맞기도 하고...

춥고 밥은 해먹어야하니 어쩔 수 없이 동네 아이들을 피해 깜깜한 밤에 몰래 나무를 하러 다녔던 그런 시간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학교 근처로 자취방을 옮겼지만,

그 고갯길에 대한 꺼려짐이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신두리 해안사구쪽으로 가다 만난 이호저수지

   몇 명의 낚시꾼들이 있다.




신두리 해안사구 도착.

겨울이라 그런지 주변의 펜션과 민박집들 대부분 문이 닫혀있고,

임대하는 곳이 많다.

이미 봄인데도 주변의 상황 때문인지 을씨년스럽다.



신두리사구센터

 사구에 대한 다양한 전시물과 아이들 체험학습과 교육활동에 좋을 것 같다.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건물 내의 시설물과 화장실, 휴식공간 등 대부분이 깨끗하고 깔끔하다.

 해안사구에 들어가기전에 한 번 둘러보면서 미리 사구의 생태에 대해 경험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해당화 열매가 매혹적이다.


식재한 갯방풍에서 씨앗이 퍼지고, 이렇듯 벽돌 틈새에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옆에는 새포아풀 겨울잎/새순으로 보여진다.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구지대로 신두리 해수욕장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사구는 바닷물에 의해 해안으로 운반된 모래가 바람에 의해 쌓여서 형성된 지형을 말한다. 태안의 신두사구는 빙하기 이후 약 1만5천 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북서 계절풍을 직접 받는 지역으로 강한 바람에 의해 모래가 해안가로 운반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모래언덕을 이룬 전형적인 퇴적 지형이라 할 수 있다.

 

해안사구는 내륙과 해안을 이어주는 완충 역할을 하며, 해일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해안가 식수원인 지하수를 공급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해안사구는 해류에 의하여 사빈으로 운반된 모래가 파랑에 의하여 밀려 올려지고, 그곳에서 탁월풍의 작용을 받은 모래가 낮은 구릉 모양으로 쌓여서 형성되는 지형을 말한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태안반도 서북부의 바닷가를 따라 형성된 길이 약 3.4㎞, 폭 약 0.5∼1.3㎞의 모래언덕으로 내륙과 해안의 완충공간 역할을 하며 바람자국 등 사막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경관이 나타나는 곳이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신두리 해안 만입부의 사빈 배후를 따라 분포하고 겨울철에 우세한 북서풍의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으며, 인접해역이 대체로 모래로 구성되어 있어 간조시 노출된 넓은 모래갯벌과 해빈의 모래가 바람에의하여 해빈에서 육지로 이동되어 사구가 형성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진 지역이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전사구, 사구습지, 초승달 모양의 사구인 바르한 등 다양한 지형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는 해안의 퇴적지형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로서 사구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사구의 형성과 고환경을 밝히는데 학술적 가치가 크다.

-출처: 문화재청










조성된 길을 따라 가며 모래언덕을 바라보다.








▲ 해당화




▲ 순비기나무


▲ 버드나무




▲ 주변에 겨울잎과 새순들이 보인다. 

    귀화식물인 다닥냉이로 보여진다.




▲ 달맞이꽃은 곳곳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 사철쑥.




▲ 장대나물




▲ 사초 종류(좀보리/통보리)




▲ 억새 새순으로 추정




▲ 버드나무. 아랫부분에 작은 모래더미가 많다.

   어떤 동물의 흔적일까? 궁금하다.











▲ 해안사구에서 만난 도장버섯.






▲ 토끼 똥



▲  초종용이 나오는 5월~6월에 다시 한 번 들려야겠다.





빙 둘러서 바다로...



▲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해서인지 방지턱을 해 놓았다.




▲  한참 들물이다.


▲ 글쎄! 큰 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차.

   지금도 저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에궁!


▲ 엽낭게의 흔적일까?




이미 많은 물이 들어와서 조간대 하부의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한 아쉬움... 

여러 패각들을 들여다보며 달랜다.






















▲ 조간대 상부쪽의 모래에 황해비단고둥 개체수가 참 많다. ^^  






신두리 해안사구를 벗어나며  이곳 저곳 바라보다.

















▲ 다음을 기약하는 부표 하나 뒤에 두고 두웅습지로 향한다.













해안사구 바로 옆에 위치한 두웅습지(두웅소류지)로 향한다.







▲ 두웅습지의 상징물 '금개구리'형상의  화장실.

    겨울철이라 그런지 닫혀있다.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해안사구지대의 동쪽에 위치한 사구습지.

두릉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웅습지가 있던 곳은 원래 바닷가였다. 해안에 사구가 만들어지면서 사구지대와 배후산지 골짜기의 경계 부분에 담수가 고여 습지가 형성되었다. 국립환경과학원에서 실시한 연대측정에 따르면 형성 시기는 적어도 7,000년 이상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두웅습지의 바닥에는 사구가 형성될 때 바람에 날려온 가는 모래가 쌓여 있었으나, 최근에 모래의 유입이 줄어든 대신, 주변부에서 유입된 점토 성분과 애기마름과 같은 수생식물의 사체가 증가하면서 점토 성분의 미립질과 유기물이 표층을 덮고 있다.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전체 면적은 65,000㎡이지만, 수면부의 면적은 길이 약 200m, 너비 약 100m, 면적 약 20,000㎡ 정도에 불과한 소규모 습지이다. 두웅습지는 신두리 해안사구가 2001년에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된 이후인 2002년에 환경부에서 사구습지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였다. 2007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

 

희귀한 야생 동식물의 서식처로서 텃새인 황조롱이와 천연기념물 323호로 지정된 붉은배새매 등 조류 39종, 멸종위기종 2급인 금개구리·맹꽁이 등 양서류 14종, 식물 311종과 곤충 110종 등이 살고 있다. 또 노랑부리백로·물장군·이끼도롱뇽 등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생물들도 잇따라 발견되었다.

 

습지 초입에 탐방객을 안내하고 습지를 관리하기 위한 탐방초소가 설치되어 있고, 생태탐방을 즐길 수 있는 안내판과 목재 관람데크가 조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 금개구리야.




▲ 갯버들이 한창이다.






▲ 생태 관련 조사와 보호를 위해 작은 배 하나 놓여 있다.


▲  뭘까?

    표본 조사용 통발일까? 아니면 마을 주민분이 놓을걸까? 치워야하나?


▲ 부들이 햇살과 놀다.









▲ 떡쑥이 나오고 있다.








두웅습지를 뒤로 하고,

다시 고향으로 향하다 갈림길 옆의 이종일선생 생가지에 들렸다.

원북에도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 계심을 이제서야 알게되다니...








민중각자는 짚단 위에 잠자고 창을 베개로 하여 끊는 물속이나 불 속의 형세라도 흔쾌히 뛰어 들어 온 누리가 자주독립되게 하여 일월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나라에 대한 공로만을 그리겠는가, 후세에 이 말을 반드시 전하여 훌륭한 조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생가 잔디밭에 애기수영 겨울잎.









에휴!

이종일 선생 생가지 옆에 위치한  태안군참전용사기념탑.

참 어울리지 않는다.

생전에 일제의 전쟁과 강점에서 그토록 독립을, 해방을 위해 싸우셨던 이종일 선생님의 바로 옆에

또 다른 침략자가 되어 참전한 것을 기념하다니...

어이가 없다.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大韓民國軍 베트남戰 參戰) 또는 월남전 참전(越南戰 參戰), 월남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군을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박정희 정부는 차관 마련 등의 군사, 경제적인 이유로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도발할 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와 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움에 빠지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 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국군을 해외 파병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한편 야당인사인 윤보선, 장준하, 김준연 등은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정부로부터 한국군의 현대화 장비를 지원받았고, 해외전투수당과 원조수당 등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파월 한국군의 일체의 경비를 미국이 부담한 상태에서 해외전투수당 및 추가지원금은 대한민국의 경제력 육성에 활용되었다.

 

이후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지원받은 해외전투수당 및 지원금으로 박정희 정권은 경공업 육성에 투자, 수출 장려정책을 폈고, 파병수당의 일부로는 국토개발사업에 충당하였다. 당시 국토개발사업에 투입된 것 중 대표적인 것이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지원금이었다. 그 밖에 미국으로부터 경제개발 차관을 제공받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베트남 참전을 베트남의 민족 해방 운동을 방해하였다며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공산주의자인 강정구 등에 의해 베트남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사건의 책임자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였고, 2000년 한국 대통령 김대중은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트남 참전 전우회 등 참전유공단체 및 참전 유공자 등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리고, 2001년 8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 단체에서는 그 이상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리도 있다. 이에 대하여 베트남 참전 전우회 등 참전유공단체 및 참전 유공자 등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편 전쟁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대한민국 기업인들과 군인들이 현지에서 베트남 여성들과의 사이에 낳은 2세들인 라이따이한(Lai大韓, Lai Daihan)과 대한민국군 일부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부녀강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양국 관계에 잠재적 문제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1999년 이래 한국의 언론 한겨레 신문에서 발간하는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이미 상당수가 드러났다.)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MBC 방송국에 난입하기도 했다.

-출처: 위키백과













큰개불알풀이 빈정댄다.

"개지랄이지!

 개수작질이지...."



희망이 없다는 것, 그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갇힌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하기에 절망을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이 안의 사람들만이 아니다. 이곳에 갇히기 전, 바깥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이 나라 국민들 대부분이 같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른다.

잘 살아보고자, 열심히 일하고 산 결과가 이거다.

젊은이들은 결혼과 출산과 연애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희망마저도 포기하는 세대가 됐다.

그런 젊은 세대를 일본과 비교하며 달관세대니 하며 헛소리하는 보수신문의 기사는 부끄러움도 잊은 짓이다.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왜 그런 세대가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대안도 없이 그저 나불거리고만 있다.

아니,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이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본질을 외면하는 개수작질에 불과하다.

 

개수작질, 그거다. 이 나라는 개수작질에 멍이 들고 희망을 잃었다.

 

'천벌을 받는 거야, 이건 천벌이야, 그렇지만 아름이만은 살아야 하는데...'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지만 윤기택은 가슴이 아팠다.

과연 아름이가 구출될 수 있을까 해서다.

그동안 겪은 일들을 생각해보니 그렇다.

'아무리 썩은 나라라고 해도...'

믿어야할 나라와 정부는 언제나 국민들을 희생시켰다.

제발 이번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국민들의 생명보다는

제 손톱 가시를 더 아파하는 놈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런 자들을 뽑은 게 국민이기에 당해야 하는 대가라면 할 말이 없지만

하늘이 도와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 칼날 '헌팅블레이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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